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옮긴이의 말 / 이장욱

다연바람숲 2017. 2. 8. 11:44

 

옮긴이의 말 / 이장욱

 

 

나는 옮긴이로서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원본과 다름없음을.

밤의 불 꺼진 방을 옮긴 것이 당신의 마음임을.

지금 응급실의 공기를 옮긴 것이 어제와 그제와 또

지난 시간임을.

 

옮긴이로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원본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것이 당신의 갈 봄 여름 없는 계절이며

그 계절이 나의 먼 후일이며

먼 후일의 겨울이 지금 당신의 뜨거운 여름임을

절정임을

 

하지만 옮긴이로서 나는 자주 당신이 누구냐고

대체 누군데 그렇게 말하느냐고 묻는 사람을 마주쳤으며

주소지와 계좌번호와 석양과 강변의 개들을 옮겨 적느라 인생을 소모했으며

결정적으로 이게 어느 나라의 문자냐

어느 시대의 사상이냐

네 애비가 누구냐

추궁을

 

옮긴이로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잘생기지도 않았고 잘난 체를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처음 가는 길을 다녔는데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정확한 이정표를 보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고

서서히 죽어가면서 내내

다른 언어로 태어났다.

 

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잘 지냈느냐고 오랜만이라고 취했노라고. 그런데 이 씨발놈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나의 먼 곳에서 어떤 원본이 되어가고 있느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실은 이미 도달한

부재중 신호의 저편에서

 

옮긴이로서 나는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슬픈가.

에이 비 씨에서 기역 니은 디귿까지

강변의 개가 북극의 곰이 될 때까지

응급실의

마지막 신호에 이를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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