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자갈의 노래 / 김병래
누구는 도시로 가서 높다란 빌딩 되고
더러는 수석이라 장식품도 된다지만
나는야, 내가 태어난 냇바닥이 좋아라
낮에는 햇빛 받고 밤에는 별빛 달빛
철 따라 눈비 오고 꽃향기와 새소리...
나는야, 이름이 없는 자갈이라서 좋아라
개구리 소리 / 김병래
초여름 밤새도록 무논의 개구리들이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들 해 쌓는다
무능한 날 꾸짖는가 비겁을 욕하는가
악을악을 악을 쓰는 악머구리 소리에
흠씬 두들겨 맞고 찌든 때를 게워내고
떠간다, 달안개 자욱한 들녘 저 끝으로
버들피리 / 김병래
월사금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쫓겨가면
보리밭 김매는 엄마 먼발치로 보이는
냇가에 숨어 앉아서 버들피리나 만들었다
엄마 가슴 에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버들피리 불며 가는 시오리 보리밭길
말갛게 뜬 낮달처럼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눈보라 / 김병래
하느님도 가끔씩 빨래를 하신다
새하얀 분말 세제 펑펑 쏟아붓고
한바탕 소용돌이로 세상을 휘저으신다
남루하고 찌들어 꿉꿉해진 목숨도
빨래처럼 개운하게 세탁을 하고 싶어
자욱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걷는다
냉이 꽃 / 김병래
골목길 담장 밑
흙먼지 쌓인 틈에
명주실 같은 겨울 햇살 간신히 부여잡고
꺼질 듯 가냘픈 숨결,
냉이 꽃이 피었다
함부로 남 해치고
제 목숨도 내던지는
흉흉한 소문들이 황사 바람 부는 골목
냉이 꽃, 모질게 피어
삶의 뜻을 묻는다
가진 것이 없어서 / 김병래
반백이 넘도록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남의 집 목장에 소들이나 돌보며 산다
방목장 귀퉁이에다 남새밭도 일구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새소리나 귀 기울이고
민들레가 피었는지 나비가 언제 나왔는지
계절의 세세한 사연 일기장에 적어둔다
닫아걸 문짝도 자물통도 필요 없는
내 마음 텅 빈 곳간엔 봄날이나 들인다
임자가 없는 봄날을 맘껏 들여 놓는다
<시>
봄, 이라는 말 / 김병래
수선화 같은 구근식물은
둥근 알뿌리로 겨울을 나고
이른 봄에 다시 싹을 틔워
또 한 해를 시작하지요
봄,이라는 말
가만히 발음해 보면
파릇하게 싹이 난 구근 같지요
이 땅의 사람들 대대손손
어느 겨울에도 잃지 않고 갈무리해온,
봄이 오기도 전에 먼저 움트는
봄, 이라는 말
억새를 읽다 / 김병래
젊어서는 사람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지만 지천명 이후로는 주로 하느님의 책을 읽습니다. 자연은 왜곡이나 오류가 없는 교과서요 경전입니다.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를 읽고 신록의 함성을 읽습니다. 밤에는 개구리 소리를 읽고 낮에는 뻐꾸기 소리를 읽지요. 여름날엔 천둥 번개와 매미 소리, 녹음방초 우거진 산과 들 넓고 푸른 바다를 읽습니다. 장마는 장편이고 반짝 지나가는 소나기는 한 편의 콩트지요.
이번 가을에도 잠자리와 코스모스를 읽고 억새도 읽습니다. 억새가 얼마나 억세게 사는지, 억새의 노후가 얼마나 허허로운지 다시 한 번 감명 깊게 정독을 합니다. 새로 펴낸 가을 호에도 읽을 게 참 많습니다.
바람과 숲 / 김병래
바람이 없으면 숲은
얼마나 답답할까, 입이 없어
노래하고 싶어도
울부짖고 싶어도
여름날 무성한 녹음의 합창을
혹한을 견디는 앙상한 가지의 신음을
바람이 없으면 무엇으로 대신할까
숲이 없으면 바람은
얼마나 허전할까, 몸이 없어
춤 추고 싶어도
몸부림 치고 싶어도
팔랑거리고 싶은 미풍의 마음
누를 길 없는 태풍의 격정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숲이 없으면
사랑이여, 너 없이 나는 무엇으로
춤 추고 노래하고 때로 울고 웃으랴
*
김병래 시인은 경북 흥해읍에서 태어나 여직까지 그곳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다.
시조 <자갈의 노래>에서처럼 그가 태어난 냇바닥이 좋아서 낮에는 햇빛 받고 밤에는 별빛 달빛 받고 ,철 따라 오는 눈비 맞으며 꽃향기와 새소리에 묻혀 사는 흥해라는 작은 마을, 냇물의 자갈같은 시인입니다.
방목장의 일을 하며 남새밭도 가꾸며 촌부의 삶을 살아가는 시인에게 자연은 위대한 교과서이며 경전입니다. 계절따라 변화하는 주변의 풍경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뜻하게 담아내는 시인의 시는, 그대로 시인의 삶이자 철학입니다.
저의 오랜 스승이신 김병래 선생님의 시집 출간을
이 자리를 빌어, 늦게 너무 늦게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축하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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