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단상 - 바람엽서

탈피脫皮, 날자 날개여, 나비여.

다연바람숲 2017. 1. 26. 11:43

 

언제였던가요.

단발머리 찰랑찰랑 속없이 웃음만 헤프던 소녀 시절, 누군가에게 선물받아 트리나 폴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이후, 그 책을 다시 펼쳐본 적도, 읽은 적도 없지만 커다란 나비가 그려진 노란색의 책표지와 페이지마다 지면을 꽉 채우고 있던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과 나비그림들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책의 줄거리와 책이 전하는 메시지도 또박또박 숙제처럼 정리를 해서 책을 선물해 준 분에게 크게 칭찬을 들었던 기억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나이의 내가 정말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었던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문득 그 책이 떠올랐어요.

서로 밟고 밟히면서 다른 애벌레들에 휩쓸려 끝없이 애벌레 기둥을 오르던 줄무늬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 그들이 기둥 오르기를 포기하고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던 것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다 끝내 기둥 꼭대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못하고 줄무늬 애벌레는 떠나버리고 혼자 남겨진 노랑 애벌레, 혼자 남아 줄무늬 애벌레를 기다리기로 한 노랑 애벌레는 고치 속에 있던 늙은 애벌레를 만나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나비로 진화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마 책 속의 내용이었을거여요.

 

오늘 문득 애벌레와 번데기, 나비 그리고 탈피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결국 두 애벌레가 올라야할 곳은 치열하게 올라가도 아무것도 없는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고 넓은 세상이며 그곳은 나비의 날개로만 갈 수 있는 곳이고 나비의 날개는 번데기의 시간을 지나 때를 기다려 고치를 뚫고 허물을 벗어야만 펼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탈피라는 것이겠지요.

 

오늘 문득 나는 나비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비가 될 수 있었으나 한 번도 나비가 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나 그 무엇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든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으나 그 무엇도 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휩쓸리고 휩쓸리면서, 떠밀리고 떠밀리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면서, 낙오하거나 뒤로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면서, 살기 위해 살고 살아있어서 살고, 저기 저 곳에 다다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무모하게 기둥을 올라가는 애벌레들처럼 날개는 꿈 꾼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더러 고치를 지어도 내가 만든 허물 속에 갇혀서 정작 날개를 펼쳐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날개가 갖고 싶어졌어요.

허물을 벗고 나비처럼 날아보고 싶어졌어요.

버릴 것이 많아 깨뜨릴 것이 많아요

깨뜨릴 것들이 너무 많아 탈피할 것이 많아요.

 

나로부터의 탈피,

사람으로부터의 탈피,

시선으로부터의 탈피,

과거로부터의 탈피,

거짓으로부터의 탈피,

습관으로부터의 탈피,ᆞ

절망으로부터의 탈피,

불안으로부터의 탈피,

두려움으로부터의 탈피,

한계의 벽으로부터의 탈피,

 

이 길이 아니다 싶어도 뿌리치지 못해 따라나서거나, 이것이 아니다 싶어도 충돌하고 부대끼는게 싫어 받아들이거나, 이 사람은 아니다 싶어도 동정과 연민때문에 약해지거나, 실패가 두려워 시작조차 못하거나, 남들의 시선때문에 용기를 못내거나, 지나간 실수에 연연하거나, 버려야할 습성인 줄 알면서도 버리지못하거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쉬이 절망하거나... 이제 구태의연한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날개를 펼쳐보려고 해요. 스스로 여기까지다 한계를 정해놓고 나를 가둬온 것들의 벽을 허물고 좀 더 넓은 세상 쪽으로 날아보려고 해요.

 

 

탈피脫皮...

버려야할 것들을 버리고, 벗어나야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2017년 올 한 해, 나를 가장 나답게, 나를 가장 소중하게 빛내 줄 아름다운 말이 될거여요.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허물을 벗고

 

 

날자 나여, 날개여, 나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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