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이 가을의 화양연화

다연바람숲 2016. 10. 20. 14:20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에 모래알처럼 새 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 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 주지 않지

 

눈멀고 귀 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 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한동안 틈만 나면 돋보기를 쓰고 시간을 보내느라 계절이 이만큼을 달려온 줄도 몰랐습니다.

 

돋보기를 벗고 보면 사람들, 세상은 늘 아득하고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책 속의 세상은 내가 속하지 않았으나 제법 그럴 듯한 세상들을 내게 보여주었고 현실 속의 누군가는 아니지만 그 누군가들로 인해 가슴 저리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경외로운 경험들을 전해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돋보기를 벗고 세상을 마주하고 보니 가을입니다.

도무지 초록을 벗어낼 것 같지않던 문 앞의 플라타나스가 이젠 제법 많은 낙엽들을 떨구기 시작합니다. 길 건너 지붕 위로 껑충 높은 키를 자랑하는 감나무는 꼭대기에 아직 바알간 감을 매단 채 내가 좋아하는 붉은 잎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름 내내 샵 앞을 단장했던 꽃들을 선물해주었던 친구가 그제는 보라빛 국화를, 어제는 노란빛 국화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한 철 아름답게 빛났으나 꽃도 지고 잎마저 시든 화초들은 친구의 손끝에서 빈 화분으로 남았습니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 버리는 것

가을에 아름다운 빛들을 바라보면 그 속절없음의 속도가 더 환히 보입니다.

 

덧없지만 아름다운 것, 속절없지만 눈부신 것,

가을에 꽃처럼 물드는 단풍들을 보면 여기 이만큼에 와있는 나의 나이조차 황혼처럼 아름답습니다.

 

잘가라 눈물겨운 날들아

 

사방 울긋불긋 단풍의 시간,

꽃보다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모든 것으로 부터 겸손해지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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