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단풍 든다.
이즈음 서둘러 지는 잎들은 사연을 지녔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어둠이 스며드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한 때 가슴을 설레게했던 한여름의 꽃들도 시든지 오래,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제 무게를 덜어내는 것들이 익숙해지는 이 계절에는,
조금 더 채우거나 늘이거나...빼기보다 더하기가 공간을 더 따스하게 한다. 기억은 기억상실을 더 심하게 앓아야 가슴이 따뜻해진다. 더러 망각은 많은 기억의 상처를 치유한다.
지금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버린 것들에겐 진심 어린 안녕을,
다가오는 이 계절의 모든 것들에겐 또 즐거운 안녕을,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나의 공중도 이제 얼마 후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나
거기,
보라빛 국화꽃 한다발을 소담하게...
넘치도록 소담하게 펼쳐 놓을 것.
그리하여 눈물겹게 슬프고 아름다울 것.
한땀 한땀 수 놓여진 저 꽃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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