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청주 다연,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다연바람숲 2016. 9. 23. 19:20

 

 

 

 

 

 

 

 

바닥 /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단풍 든다.

이즈음 서둘러 지는 잎들은 사연을 지녔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어둠이 스며드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한 때 가슴을 설레게했던 한여름의 꽃들도 시든지 오래,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제 무게를 덜어내는 것들이 익숙해지는 이 계절에는,

조금 더 채우거나 늘이거나...빼기보다 더하기가 공간을 더 따스하게 한다. 기억은 기억상실을 더 심하게 앓아야 가슴이 따뜻해진다. 더러 망각은 많은 기억의 상처를 치유한다.

 

지금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버린 것들에겐 진심 어린 안녕을,

다가오는 이 계절의 모든 것들에겐 또 즐거운 안녕을,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나의 공중도 이제 얼마 후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나

 

거기,

보라빛 국화꽃 한다발을 소담하게...

넘치도록 소담하게 펼쳐 놓을 것.

 

그리하여 눈물겹게 슬프고 아름다울 것.

 

한땀 한땀 수 놓여진 저 꽃들처럼.

 

 

.

'오래된 시간 > 끌림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가을의 화양연화  (0) 2016.10.20
흐린 날의 산책  (0) 2016.10.02
부여 G340 갤러리 카페  (0) 2016.09.21
우리,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맙시다.  (0) 2016.09.20
지금 여기,  (0) 201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