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아직 / 김선우

다연바람숲 2014. 3. 13. 15:35

 

아직  / 김선우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꽃 피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

         시인의 부음이 그 전에 당도할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슬프지 않다고

  습관이 되지 않았다고 아직

  부재를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고

  인간의 마을에 구름의 여린 눈꺼풀 위에

  문 닫은 나무들의 냉담 위에

  비린 바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붉은 바람이

 

  여러 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깃발을 흔드는 죽은 시인이여, 장미 열매를 쪼개고

  붉은 차돌을 꺼내 손에 쥔 아직 살아있는 시인이여 장미덩굴 국경을 건너

 

  가로수 밑 식탁에 작년 꽃의 두개골을 올려놓지 말 것

  기억을 두려워해 기억을 배신하는 눈보라

  식탁 위 말라붙은 심장이

  붉은 장미열매의 장화를 신고 눈보라 속을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자여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천둥소리 밑으로

  웅크려 시를 듣는 자여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절망 때문에 질투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경쟁 때문에 증오 때문에 냉소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수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시취를 맡았다는 개들 아직 없고

  미래가 중단되었다는 진단서 아직 없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방부된 속삭임 속에

  아직 살아있는 시인은 죽을 때를 기다렸다

 

  저 숱한 죽음의 이유는 비루하다 최선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말을 지껄이는 시인의 매장을 바라는

  은밀한 마음들 애도하며 시인은 쓴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라고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검은 밑줄이

  시인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밑줄의

  오른쪽 끝에 힘이 들어가 씨앗처럼 잠시 반짝였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죽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꽃이 와야 할 필요 없어진 지 오래인

 

  아직

  사랑해서 죽은 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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