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해준 것들 / 김경미
소의 어금니와 여물이 되게 해주었다
쏟아지는 빗방울 하나마다 일일이 작고 둥근 접시에 담아주었다
너무 낮은 자세를 원하던 그 감색의 문 앞
상추잎처럼 얕게 묻어놓은 손잡이
잡자마자 뿌리째 뽑혀 함께 뒹굴 때 안에서 들리던 웃음소리
똑같은 흉기가 되지 않게 해주었다
촛불과 손가락을 기울여 벽에 갖가지 사슴을 데려와 주었다
옷을 염색할 땐 펄펄 끓는 물과 염료에다 굵은 소금 한 줌을 넣어야 한다
버림받을 때 쓰라고 가방에 초록색 가발과 설탕을
넉넉히 넣어주었다
나무에 마냥 기대지 말라고 나뭇잎들을 몇 달씩 어디론가 데려갔다
〈낡은 전축에서 불려나온 스무 살 추억이 아직도 상처받을 때
—미제레레 라크리모사 레퀴엠 같은 발성법에 대해〉
가르치라고 해주었다
슬로바키아 일요일 오후의 깃털 같은 광장에서 내가 울었던 이유를
당신만 알기를 부디
그러하기를 약속해주었다
<현대시학> 20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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