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라틴어 수업 / 한동일

다연바람숲 2018. 2. 5. 17:47

 

 

 

 

 

 

Nom tam praeclarum est scire Latinum quam turpe nescire.

라틴어를 모르는 것이 추하지 않은 만큼 라틴어를 아는 것도 고상하지 않다.

 

 

- 뭔가를 배우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있어 보이려고, 젠체하려고 시작하면 좀 어떻습니까? 수많은 위대한 일의 최초 동기는 작은 데서 시작합니다.

 

- 삶의 긴 여정 중의 한 부분인 학문의 지난한 과정은 어쩌면 칭찬 받고 싶은, 젠체하고 싶은 그 유치함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릅니다. 소위 배움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합니다.

 

-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 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De Elegantiis Linguae Latinae

라틴어의 고상함

 

 

- 저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쩌면 그것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결국 빌라가 말한 '라틴어의 고상함'은 라틴어가 문학적으로 혹은 언어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언어를 제대로 잘 사용할 때에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한데, 라틴어가 바로 그런 언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

 

 

-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Do ut Des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

 

 

-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개인이든 국가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 어쩌면 삶이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만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준비 속에서 좀 더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라는 로마인의 편지 인사말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타인의 안부가 중요한,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문득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의 사고가 어느새 그렇게 변해버린 건 사람들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낼 여유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Carpe Diem

오늘 하루를 즐겨라

 

-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겓,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에요. 시인 호라티우스와 키팅 선생의 말은 내게 주엊ㄴ 오늘을 감사하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속삭임입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 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까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아는 만큼 본다

 

 

- 중요한 건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잘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알고, 보는 것을 넘어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아는만큼 보인다고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Dilige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 우리 모두는 생을 시작하면서 삶이라는 주사위가 던져집니다.어른들에게 물어보세요. 돌이켜보면 시간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겁니다. 신에게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만큼이냐고요. 하지만 신은 침묵으로 답하겠죠. 누구도 자기 생의 남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또박또박 살아갈 밖에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우리조차도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

 

오래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해를 넘겨 읽었다.

 

무작정 아무 페이지나 들추어 읽거나

그 날의 마음이 가는 제목을 찾아 읽었다.

배우고 익히기에는 벅찬 라틴어라서 또 이 책을 읽는다고 배울 수 있는 라틴어도 아니었지만,

라틴어의 체계,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와 철학, 이야기들을 접하는 과정이 좋았다. 행복했다.

 

어떤 것은 낯설거나 새롭고, 어떤 것은 익히 들어 온 말들이지만 응용과 예시로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언어들이 결국은 삶에서 파생되고 삶 속에 있고 삶 그 자체임을 알아가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불쑥불쑥 읽었지만, 듬성듬성 읽었지만 순서와는 상관없는 삶의 이야기여서, 인문학이고 교양이어서,

전체를 아울러 한 번 더 숙독하고야 한 학기를 넘겨 강의를 듣고 수업을 마쳤다는 기분이 든다.

 

읽었다는 것이, 그래서 조금 더 알았다는 것이

나이 한 살을 더하는 즈음에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