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단상 - 바람엽서

나는 중년이다. 그게 어때서?

다연바람숲 2017. 11. 29. 18:02

 

 

 

노년의 얼굴은 외형적인 조건에 자신을 속박시키지 않는다.

그 얼굴은 그가 살아온 세월, 시간이 만져 준 육체의 이면을 정확히 보여 준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청춘의 아름다움보다 냉혹한 것이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살아온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젊음은 찬란한 매혹이지만 젊다는 것만으로 아름다움이 획득되는 경우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 인간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공명시키는 아름다움은 거의 언제나 잘 늙어 가는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기를 원한다. 아름답게 늙어 가는 이들을 바라볼 때 행복하다. 다양한 늙음의 양식을 바라보며 잘 늙어 가기 위한 지혜를 구하곤 한다. 때로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겨 보기도 한다. 아, 참 아름답구나. 혹은, 절대로 저렇게 늙어서는 안 되겠다, 등등. 운 좋게도 내게 평균 수명만큼 사는 것이 허락된다면, 내가 그랬듯이 나를 아는 젊은이들이 아, 참 아름답게 늙었군요, 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김선우 <사물들> 중에서

 

 

 

아주 오랜만에 부산에 사는 여고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카톡을 보다가 내 프로필에 올려진 사진을 보고 반가워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니는 여전하네~" 구수한 부산 사투리가 그리웠던 목소리를 타고 전해온다.

일단, 사진은 사진일 뿐 요즘 카메라의 탁월한 뽀샵 기술에 속지말 것을 당부한다.

나이만큼 적당히 주름도 늘었고, 적당히 아줌마가 되었고, 적당히 중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친구는 할매가 되었다고 한다.

딸아이가 시집 가 벌써 손주를 보았나 했더니 그건 아니란다.

친구는 30년차 공무원이다. 연륜이 있다보니, 이젠 함께 일하는 여직원들이 모두 젊은 친구들이란다.

30, 40대의 젊은 친구들이 50대는 아예 대놓고 할매라고 부른단다. 그렇게 할매가 되었단다.

50대의 여자 얼굴은 거의 다 비슷비슷하게 보여서 구분이 안간다는 말도 한단다.

다수가 소수를 몰아가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나이도 할매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라고,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젊은 친구들에게 할매 대접 받자니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한때는 직장에서 한가인 닮았다고 김가인이라 불렸을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친구이다.

적어도 30대엔 20대 같았고, 40대엔 30대 같았을만큼 제 나이보다 훨 어려보이는 얼굴을 가진 친구이다.

가끔씩 올라오는 최근의 사진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초라하게하는 미모가 변함없이 빛나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단지 나이때문에, 단지 50대라는 이유로 할매 대접을 받으려니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으리라.

 

" 괜찮아. 할매가 뭐 어때서. 주변엔 벌써 손주봐서 정말 할매가 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젊고 예쁜 할매도 괜찮아."

 

솔직히 생각해 보면 나도 그 나이 때 그 젊은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었다.

내 나이 20대 때 30대의 여자는 너무 노숙한 어른이었다.

내 나이 30대 때 40대의 여자는 이미 살만큼 산 중년의 지긋한 어른이었고,

내 나이 40대 때 50대의 여자는 이미 여성성과는 거리가 먼 나이의 사람이었다.

내가 나이 든 여자로 보았던 30대가 되었을 때, 그 나이의 나는 아직 어렸고

내가 지긋한 중년으로 보았던 40대가 되었을 때, 그 나이의 나는 아직 젊었고

내가 여성으로서의 수명이 다 된 나이라고 보았던 50대가 되었을 때, 그 나이의 나는 여전히 여자였다.

우리도 그런 철없는 생각을 했던 나이들을 살았고, 그 나이들을 지나오면서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 생각해봐. 우리도 그 나이에는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니?"

누군가에게 말로 해서 상처주었던 기억은 몰라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에는 친구도 공감을 한다.

"듣기에 섭섭해도 우리는 그 나이를 먼저 살아 본 사람이니까. .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지."

"그리고 너는 당당해도 돼. 네가 그 젊은 친구들의 나이였을 때 너는 그 친구들보다 훨씬 젊고 예뻤을테니까."

결국 그 젊은 친구들도 나이를 먹는다. 언젠가는 자신들이 할매라 불렀던 여자의 나이가 될 것이고,

그 나이가 되어서도 젊음을 욕망하고 세월에도 늙지않는 마음을 가진, 여전히 여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친구에게 나의 이야길 한다.

얼마 전 아는 분이 뜬금없이 이마와 눈만 찍힌 사진을 보내오셔서 무엇인가 여쭤봤더니 이마와 눈밑 주름제거 시술을 하셨단다.

칠순이 다된 어르신께서 젊어보이려고 주름 제거 시술까지 하셨나 보다. 어르신답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어르신께서

나도 눈밑 주름이 많으니 시술을 해보라신다. 눈 밑 다크써클 제거만 해도 훨씬 젊어보일거란다.

그래서  "저는 제 주름살도 늙어지는 얼굴도 다 받아들이며 살려고요. 나이 드는게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했더니 그분 왈,

그렇게 받아들미며 산다면 그럼 머리염색도 하지말아야지. 머리 염색은 왜 하느냐신다.

물론 이젠 새치가 아닌 흰머리가 많이 나 머리염색은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백이든 백발이든, 그렇게 자연스럽게 둘 생각도 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다. 살아계신 부모 앞에서 나이 어린 자식이 허연 머리를 보이는 것도 예가 아니라는 말씀을 들은 바 있어 적어도 새치염색은 꼭 한다. 염색해서 늘 단정한 검은 머리를 하고 계신 친정 부모님 앞에서 어린 막내딸이 속없이 허연 머리를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랬더니 그 어르신 말씀, 나더러 민주당이란다. 그렇듯하게 자기 합리화를 한단다. 내가 하는 건 다 옳다는 논리가 딱 민주당이란다.

" 제 나이가 오십 중반입니다. 이 나이에 얼굴에 주름 있는 것도 당연한거지요. 나이드는 것도, 주름살도 다만 부끄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진짜 부끄러운 건 얼굴의 주름이나 다크써클이 아니라 마음에 깊게 골을 낸 비뚤어진 마음의 주름살이라고, 그 말만은 차마 하지 못했다.

 

주름살을 제거하거나 성형을 하거나 젊고 예뻐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것에 대하여는 어떤 거부감도 없다.

필요하다 싶으면 하는 것이고, 하고싶으면 하는 것이지, 했다고 해서 달리 본 적도 없고, 해서 예뻐지고 젊어졌다고 딴지를 걸어본 적도 없다.

나이드는 얼굴에 불만이 느껴지면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나처럼 바탕이 별로라서 한다고 더 예뻐질 일 없으니 별생각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지극히 다른 개인적인 관심과 성향인 것이지, 한다 안한다를 논리를 내세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론은, 나이 드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음은 그 자체로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으나 언젠간 빛이 바래는 법이다.

그 빛이 바랠 때 스스로 발광하는 자기 빛을 지녀야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너는 늙어 봤니? 나는 젊어봤어. 너는 오십대가 되어 봤니? 나는 30대도 40대도 살아봤어."

이런 흔한 말이 위로가 될리는 없겠지만 이 나이를 살아도 아직 세상엔 못해 본 것이 많고 배울 것이 많은데, 남들보다 조금 더 살았다는 것이, 조금 더 세상을 알고 배우고 경험한 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살아 온 나이만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어린 사람들에게 차라리 할매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인생 잘못 살았다고, 어리거나 철없다는 비판을 들으면서 나이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줌마나 할매나 이젠 모두 중년의 이름 아닌가. 할매가 어때서? 할매가 너무 예쁘고 젊어서 어쩌면 젊은 친구들이 시샘해서 붙이는 호칭일수도 있지 않은가.빽없고 돈없고, 이런 저런 배경 계급장 모두 떼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직장에서 남자들에게조차 밀리지않고 당당히 자신의 지위를 거머쥐고 지켜가는 나이 든 선배에 대한 존경과 질투가 할매라는 이름으로 축약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 당당해져도 돼 친구야.

 

친구가 웃는다.

우울했던 마음에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

"내 편이 여기 있었네. 고맙다 친구야."

 

시간과 거리가 우정에 걸림돌이 되지는 못한다.

친구였고, 친구이고, 또 오래 친구일 것이므로 앞으로 함께 나눌 삶의 이야기도 더 많아질 것이다.

50대의 나이여서 그만큼 우정의 연륜도 깊어가는,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줄 친구가 있어 또 삶은 외롭지않을 것이다.

거기 그렇게 있어줘서 고맙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