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꽃의 권력 외 / 고재종 시집

다연바람숲 2017. 9. 26. 19:04

 

 

 

 

꽃의 권력 /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구도자

 

 

 

나무는 결가부좌를 튼 채 먼 곳을 보지 않는다

나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제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메마르고 긴 몸, 고즈넉이 무심한 침묵

나무는 햇살 속을 흐른다 바람은 나무를 관통한다

 

나무는 나무이다가 계절이다가 고독이다가 우주이다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나무이기에 나무이다

 

제 머리숲을 화들짝 열어 허공에 새를 쏘아 댄들

나무는 거기 그만한 물색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황혼에 대하여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간절해지는 황혼 속

그대는 어쩌려고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나는 지그시 눈을 먼 데 둔다.

붉새가 점점 밀감빛으로 묽어 가는

이런 아득한 때에

세상은 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나는 다만 방금까지 앉아 울던 박새

떠난 가지가 바르르 떨리는 것하며

이제야 텃밭에서 우두둑 펴는

앞집 할머니의 새우등을 차마 견딜 뿐.

밝고 어두운 것이 서로 저미는

이런 박명의 순순함으로

뒷산 능선이 그 뒤의 능선에게

어둑어둑 저미어 안기는 것도 좋고

저만치 아기를 업고 오는 베트남여자가

함지박 위에 샛별을 인 것도 좀 보려니

그대는 질문의 애절함을

지우지도 않은 채로 이제 그대이고,

나는 들려오는 저녁 범종소리나

어처구니 정자나무가 되는 것도 그러려니

이런 저녁, 시간이건 사랑이건

별들의 성좌로 저기 저렇게 싱싱해질 뿐

먼 데도 시방도 없이 세계의 밤이다.

 

 

 

사랑의 법문

 

               

등산하다가 손에 송진이 묻었는데
수건으로 닦고 물로 씻어도
끈적거림이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송진이란 소나무의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소나무의 피나 고름 같은 것

그대가 내게 남기고 간 사랑의 상처에서도
그처럼 뜨겁고 끈끈적한 것이
한사코 흘러내리던 적이 있다
한사코 별은 빛나고 기적 소리 들려도
틈만 나면 내리는 비의 우울에 노출된
저주와만 같은 눈물의 엘레지들

하물며 질겅질겅 씹다가 내뱉는 껌도
그대 옷에 붙어 그대를 낭패에 빠뜨리리라.
원망해 댈 힘조차 잃어버린 동안
소나무는 그 상처의 진액으로
맑고 투명한 보석, 琥珀을 만들었으니

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해 보지만
평생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
사랑 아니겠느냐 하는 이 화려한 비탄이여


사랑은 여전히 안심법문을 모른 채
피그말리온의 염원처럼
피가 마르도록 꿈꾸는
그대의 분홍빛 연한 부드러운 살

 

 

崖月 

 

 

저렇게 큰 바다파랑을 면벽하고

너의 두 눈은 무엇을 응시하는가

 

속눈썹 둘레가 붉게 물들어 있는

저렇게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너의 한 눈동자는 뿌옇게 흐려지고

또 한쪽은 푸르게 빛나고 있다

 

네 앞에는 절벽바다에 걸린 달

 

그 달의 얼굴을 한 채

너의 눈은 무슨 슬픔을 견디고

또 한 눈은 분노의 형광을 쏜다 해도

난 성게국에 소주를 마실 뿐

지금 보고 듣는 것이 하나 없다

 

보도 듣도 못하는 이 바다파랑 속

홀연한 그 무언가를 어떻게 호명하랴

저 수평선에 이는 먹구름 같은

너나 나나 말할 수 없는 생이

바닷가의 검은 현무암으로 굳어 버린들

 

꿈으로도 사랑으로도 가닿지 못하는

경각의 질문만이 있는 경우도 있다  

 

 

 

시간에 기대어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

 

세계와 우주를 독학한 구도자로
13년 만에 돌아온 남도의 시인


1980년대에 고재종 시인은 고향 궁산리에 대한 시를 썼고 “척박한 농촌의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며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균제미를 갖추었다”(『날랜 사랑』 해설에서)는 점에서 ‘생태시’, ‘농촌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를 둘러싼 외적 현실에 대한 시인의 시심은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하기보다는 지치면 자연에서 위로받아 인간의 본질적인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쪽빛 문장』). 이제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진실성을 최상의 언어 감도로 형상화해 내는 데 멈추지 않고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자연을 받아들인다. 또 “생의 본원적 형식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과 탐구에 노력”하면서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를 사색한 오랜 숙성의 시간의 산물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이번 시집 『꽃의 권력』에는 모두 6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시인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햇살 속을 흐른다 바람은 나무를 관통한다”면서 나무는 ‘구도자’가 아니라고 부정한다(「구도자」). “꽃길에서는/꽃의 권력을 따른다”며 사람처럼 꽃도 독자적 존재로서 권력을 지닌 것으로 본다. “노래하고 반짝이는 강물의 오랜 전통 하나는/타는 울음을 다독이며 멀리 세월을 빗는 일이라네”(「강의 노래」)라며 강물에 삶을 빗댄다. “나의 영혼이 우는 소리”마저 들리는 숲길에서 “나의 말을 버리면”서 혼자인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숲길」). “누구라도 자기 자리에 이르게” 하는 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루가 끝나 가는 즈음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황혼이 간절해”진다며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먼 곳을 바라본다.

 

 

저자 고재종 시인은

 

1957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

 

오래 기다렸다.

2004년 시집 <쪽빛 문장> 이후 꼭 13년만이다.

 

뵐 때마다 언제나 첫 인사가 시집은 언제 나오나요 였다.

물을 때마다 그 해 안에 나올 것이라는 답을 무수히 들으면서 십 여년이 흘렀다.

농촌시에서 독학자로 변화했던 시인의 시가 광주에서 담양의 궁산리로 터전을 옮기고,

고향에서 또 어떤 시세계의 전환점을 맞이할 것인지 보고싶었고 궁금했고 기대되었다.

 

시인에게 나는 바람숲이다.

내 본명보다는 바람숲으로 더 많이 불린다.

오랫동안 나는 시인의 팬카페 카페지기였고, 여전히 명목상이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같은 카페에서 열정적으로 시를 토론했던 회원들은 지금은 거의가 등단한 시인이 되었다.

광주에서 청주, 그 열악한 거리때문에 시인의 시창작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을

충북작가회의,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신 도종환 선생님께 소개시켜 주신 분도 시인이었다.

시를 쓰기엔 자질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기도 해서였지만, 샵을 운영하면서 시를 놓게되었고

서서히 카페에도 소원해져 시인에게는 끝까지 책임을 지지못한 죄송함이 앞서 오래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다.

 

시인의 시집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시인의 언어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송곳처럼 찌르는 예리함을 지녔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무심한 성찰이 그대로 나이고 또 내가 아닌 시의 언어는 그대로 또 우리이다.

이전에 지면에 발표되었던 시들이 시집에서 어떻게 퇴고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되었다. 

 

곧 평론집도 나올 거라고 한다.

시인의 시에 대한 평론을 읽기 위해 한 때 카페를 찾던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물처럼 음악처럼 감정을 적셔가며 유려하게 흐르던 시인의 평론 또한 정말 기다려진다.

 

하물며 꽃의 권력에도 따르는

가장 인간적이고, 마음 따뜻한 시인

고재종 시인님의 <꽃의 권력> 시집 내심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