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열정 - 끌리는詩

너는 아마 싱싱한 나무일 거다 / 이인해 시집

다연바람숲 2017. 10. 10. 17:13

 

 

 

 

 

 

안경

 

 

안경 써야 되는 건 불행

안경으로라도 세상 볼 수 있는 건 다행

나는 추운 날 마스크를 할 수 없음이 불편한 등등

불행한 다행 속에

먼 창밖 바라보며 안경을 닦는데

 

아우구스피츠에 산더미로 쌓아놓고 간

아이들의 안경 어른들의 안경

안경 쓰고도 미래를 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안경을 쓰고 있었던

아버지도 저녁 떡국 두 그릇 자시고 이십 분 만에

심근경색으로 떠나셨다

 

안경 닦는 게 직업이었던 스피노자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다 했다

 

 

 

아내

 

 

앞으로 세 밤만 지나면 꼭 올 것이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다

 

외손자 봐주러 떠난 지 이틀째

새벽엔 그 대신 뜨락 화분에 물을 주었고요

 

지금 댓돌에 앉아 시커먼 전깃줄 사이로

참 오랜만에 별을 봅니다

 

이제 발 씻고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잠들 것입니다

 

길 건너 빌딩 깃대 끝에 깃발이 조금씩

나풀거리네요

 

 

 

눈물

 

 

세숫물 속에 몰래 눈물을 섞어보았는가

용서받지 못한 가난때문에

무식때문에

치사스런 젊은 날의 연정때문에

울어보았는가,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때문에, 그러나

늙으면 눈물은 마른다 강물 같은

바람 같은 허무 때문에

그늘 속에 버려진 낙엽같이 마른다

허연 입술 위에 연륜처럼 마른다

또 하나 그대가 두고 간 적막 때문에

 

 

 

자화상

 

 

사람들은 모른다

아는 체 하지만 나의 시를 모른다

 

나의 창밖 풍경을 모른다

작은 고독의 문을 나가

홀로 걸어가는 달빛 강둑을 모른다

 

날마다 닦아내는 나의 유리창

저 밖의 풍경을 모른다

 

내가 마시고 사는

목숨의 수정과를 모른다

 

 

 

적막

 

 

맑은 물만 마시고 사는데

꽃잎 색깔들

제가끔 붉고 파랗고 절절하다

 

붉은 꽃잎 으깨보니 자주색이었다

푸른 꽃잎을 으깨도 자주색이었다

붉은색 푸른색 함께 으깨어도 자주색

그런데 흰색은 그냥 '맑은 물'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삶의 정체가 물이라니

죄 없이 산 생애가

아무것도 없는 물이라니

 

어찌 보면

흰 꽃의 깊은 의미는 적막인 듯하다

하얗게 찬란하게 살고 물로 돌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또 거룩하다

 

찬란한 이력을 남긴

짙게 짙게 기록으로 남아 이야기로 살아나는

훌륭한 사람들은 자주색인 거 같다

그렇다고 인생이 꼭 자주색이어야 하는가

 

꽃들의 전쟁터 같은 화단에서

흰 꽃을 바라보는 나는

한참 아름다운 적막의

산모롱이를 돌아서 가고 있다

 

 

달력

 

 

넘겨진 날짜는 고체

펼쳐진 달력은 액체

다음 달 날자들은 기체라고 하자

 

지나간 날들은

지워지지 않는 그림

아름다웠다고 하자

 

오늘은 강물

배 띄워 노래로 가고

 

내일 위해

꽃씨 파묻어

미리 향기를 부르자

 

오늘 달력 위에 흐르는

저 푸른 강

 

 

 

*

 

명절 연휴를 앞둔 날에 손수 시집을 전해주고 가셨다.

시집을 읽으며 또 천상 시인일 수 밖에 없는 시인의 삶을 들여다 본다.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내셨고 네 번째의 시집이지만 시인은 여전히 시를 공부하고 계시고

칠순이 훨 넘은 연세이지만 역시나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일하고 계시는 현역 직업인이시다.

아직 눈 뜨면 출근할 일터가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시는 것처럼, 시 또한 시인의 생활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언어에는 독한 말이 없다.

시인의 언어에는 그 흔한 기교도 없다.

담담하게 바라보고 담백한 언어로 말하는데 그 속에 해탈이 있다.

살아온 날의 이력, 삶의 연륜을 대신하는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불행보다는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시 속에 있다.

 

이미 시인의 이름을 갖고도 여전히 배움의 길을 걷고 계신 모습도,

늘 건강하신 모습으로 삶과 시, 모두 열정적으로 가꿔가시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이인해 선생님의 시집 <너는 아마 싱싱한 나무일 거다>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