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너의 기억을 지워줄께 / 웬디 워커

다연바람숲 2017. 8. 24. 20:08

 

 

 

 

 

 

사랑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어휘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말로 사랑을 표현하고, 우리 몸 안에서도 다르게 느낀다. 사랑은 누군가를 울리고, 또다른 누군가를 웃게 한다. 누군가를 화나게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슲게도 한다. 누군가를 흥분시키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를 나른한 만족감에 잠들게도 한다.

                                                                             page 25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굴욕 중 하나는 스스로 알아서 처신할 수 있게 될 때쯤에는 처신할 뭔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 아닐까?

 

                                                                              page 39

 

아무리 육체적으로 발달한 아이들이라도 그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성인이 되려면 아직 까마득히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나쁜 결정을 내리는 까닭은 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냥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단이 아직 없을 뿐이다.

 

                                                                              page 49

 

세상에 모호하지 않은 사랑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톰 크레이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했던 말이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경험적, 임상적 관점에서 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디자인이 돼 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꺼이 죽을 의지가 있는 것은 자식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란 것을 뼛속 깊이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대신 죽어줄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식이 훨씬 소중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 타인을 위해 죽도록 훈련된 군인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에게 '나머지 사람들' 이란 실제로 자식을 뺀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배우자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하지만, 적어도 몇몇은 그렇게 말하지만, 내 생각에는 사실이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를 들어 버스에 몸을 던져 아내를 구할 남편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남편을 구하려고 뛰어드는 아내도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만 그럴 수 있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만.

 

                                                                              page 150~151

 

세상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나쁜 성적, 멍청한 정치가, 사회적인 멸시.

불행히 정말 중요한 일들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얼마 안되는 시간을 망쳐버리는 일들. 취소하거나 치유할 수 없는 일들. 우리는 그런 일들을 후회한다. 그리고 후회는 죄책감보다 더 도착적이다. 질투보다 더 유독하다. 공포보다 더 강력하다.

 

                                                                              page 278

 

 

망각 요법의 매력이 뭔지는 안다. 너무나 쉬워 보이니까. 그냥 과거를 삭제해버리면 된다니,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으리라.

잃어버린 열쇠를 영영 찾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귀신에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환자들이 맨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매번 똑같은 말을 해준다. 모든게 잊히지는 않는다고. 이 말을 들으면 환자들은 안심한다. 전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page 372 소설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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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었어요."  - 샬럿 클레이머

"아니요. 그 악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봐야 회복할 수 있어요!" - 톰 크레이머

 

열다섯 소녀를 처참하게 유린한 강간 사건.

딸의 기억을 죄다 지우고 싶었던 엄마와 그놈을 반드시 찾아내 응징하고 싶었던 아빠.

망각의 치유 후 귀신처럼 근본없는 상처의 휴유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어린 소녀 제니와

소녀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위해 지워진 기억을 쫓는 정신과 의사.

 

이 소설은 어린 소녀에게 닥친 강간이라는 최악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심리 스릴러이다.

 

나쁜 기억을 지우는 트라우마의 치료법이 갖는 부작용,

인간에게 과연 고통의 순간에 대한 망각이 최선의 치료법이 될 수 있는가란 의문은 이 소설이 제일 먼저 묻는 화두이다.

 

마치 나레이션처럼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나, 앨런 포레스터 박사 정신과 의사이다.

정신과 의사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만큼 전문적으로 사람들의 심리에 접근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상처와 비밀들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마음에 닿게 된다.

 

물론 사건이 있고 범인을 쫓는 수사 과정이 있고, 피해자가 있고 용의자가 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러 소설로서의 수작임은 확실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의 이야기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

부모의 사랑,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지켜야할 단 하나의 존재,

자식을 향한 부모들의 처절하고도 지독하고 거룩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영화화 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느낌대로라면 스릴러로서의 짜릿한 흥미와

가족,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라는 휴머니즘의 감동까지 함께 느낄 수 있으리라.

 

너의 기억을 지워줄께.

 

소설 속 주인공 화자의 역활대로라면

 

너의 기억을 찾아줄께. 겠지만.

 

기억이란 결국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