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읽는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page 9
몽테뉴의 수상록, 누렇게 바랜 문고판을 다시 읽는다. 이런 구절, 늙어서 읽으니 새삼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page 14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page 28
나는 악마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혹은 둘 다인가.
page 33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짖궃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page 36
머리가 복잡하다. 기억을 잃어가면서 마음은 정처를 잃는다.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page 48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page 52~53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 차라투수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마치 나 들으라고 써놓은 듯한 니체의 글.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page 57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 혼자 결정하고 집행하는 삶에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page 87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page 98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page 115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page 117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page 143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age 145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page 148
*
티비 알쓸신잡에서 김영하라는 작가를 알았다.
미안하게도 그 이전엔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나는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존경한다.
그것이 아무리 쓸모없고 잡다한 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리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거만하거나 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고 고요하게 지식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
알쓸신잡의 모든 패널들이 그러하였지만 유독 더 김영하란 작가가 알고싶어졌던 것은 어쩌면 그가 소설가이기도 하려니와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폭넓은 지식들을 조근조근 전하던 그의 진중하고 고요한 말투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을 모두 읽어보리라 결심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소설이나 작품보다 먼저 작가를 알았다는 것이 장단점이 있거나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내겐 단점일수도 장점일 수도 있게 그의 소설 속 화자의 문장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그려지지 않는 70살, 김병수라는 살인자의 나레이션을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읊었다.
단편의 기억들, 기억의 메모들,
소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연쇄살인자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이다.
짦은 문장, 속도감 있는 전개, 숨막히는 시간과 시간의 연결고리들
모든 일상을 정지시키고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게 하는 마력의 책이다.
늙은 연쇄살인범과 알츠하이머, 조금은 낯선 조합이
기억과 망각, 과거와 현재, 죄와 벌로 어떻게 맞닿아 흘러가는지가 이 소설의 묘미랄 수 있겠다.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단계에서 스토리조차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소설 속의 화자인 주인공도 모르고 그 소설을 잃는 우리도 혼돈 속에 헤맨다.
마치 소설 속 존재했다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다시 있기도 하는 그의 개 한 마리처럼.
어떤 사실은 사실이고 어떤 사실은 망상이고 그 불분명한 경계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르고도 수치는 알아도 죄책감은 모른다는 살인자가
망각이라는 형벌에 놓여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잃어가는 모습, 시간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한 모습을
우주의 한 점으로 표현한 마지막 문장이 오래 뇌리에 남는다.
능수능란하다.
문장과 문장, 호흡과 호흡 사이의 긴장감이 넘쳐난다.
읽기에 쉬운 글이 얼마나 어렵게 쓰여졌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짧은데 깊고 쉬운데 오래 감정을 묶어두고 생각하게 한다.
막힘없이 흘러가는 재미와 흥미가 넘치는데 이야기 속에 철학이 있다.
작가가 인용한 철학적인 문장들이 아니더라도
시간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9월에 살인자의 기억법이 영화로 개봉된다고 한다.
두서없는 기억의 단편들을 어떻게 영상의 스토리로 그려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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