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엔 추리 소설이지.
여름엔 뭐니뭐니 해도 추리 소설이 제 맛이지.
오래 전 길리언 폴린의 나를 찾아줘를 함께 읽었던 누군가가
그 비슷한 느낌의 소설을 찾아냈다고 적극 추천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주문했던 소설이다.
여성이 썼고, 여성이 주인공이고, 가정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의 공통점은 확실한 듯 하다.
하지만 뭐랄까. . . 나를 찾아줘의 주인공이 철저히 피해자의 얼굴을 한 반전의 가해자였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해결의 실마리조차 없이 궁지에 놓인 약자라는 것이 큰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로는 지독한 사랑이 누군가에게 최고의 약점이 되어 볼모가 된다는 사실,
주인공 그레이스에겐 그녀의 부모마저 버린 다운증후군의 여동생이, 여동생을 향한 책임과 사랑이
그녀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그녀를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음이 내내 가슴 아팠다.
너무 여려서, 너무 나약해서, 너무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답답해서
그 끝이 안보이는 공포가 두려워서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옥죄고 답답해졌던 순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소설 속에 녹아들어 한동안 나도 모르게 온전히 그레이스처럼 무력한 공포를 경험하고 나온 것만 같다.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내 폭력이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요즘,
가장 완벽한 부부 혹은 가정의 모습 뒤에 감춰진 공포의 진실을 숨긴 사람들이, 이 세상의 그레이스들이
이 사회에 혹은 내 주변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소설이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로서의 소설만은 아닌 것이다.
소설 속의 싸이코패스 잭만큼은 아니지만, 건너건너 불구경하듯 주워들은 세상 사람들 이야기 속에는
남들에겐 가장 완벽한 신사의 얼굴을 하고 가정 내에선 폭력적이고 악마의 얼굴을 한 인간들이 있는 걸 보면
소설이 소설이 아니고, 가십이 가십이 아니고, 철저하게 우리 이웃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섬뜩해진다.
그래서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철저하게 계산된 관계 속에 고립되어 도움조차 구하지 못하는 절망,
마치 사방 벽이 옥죄어 오는 꿈, 깨어나려고 몸부림 쳐도 도무지 깨지지않는 꿈을 꾸듯 숨가쁘게 읽어내렸다.
소설 속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폭력도 없고 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끔찍하고 잔인하며 공포의 폭력을 다룬 소설이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빼앗기고 권리를 잃고 감금되고 사육되는 모습 그대로가 폭력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고싶어도 죽을 수 없는 절망과 절박함이 그대로 폭력이다.
슬프지만,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해도되나 싶을만큼 몰입도가 높아 재미있는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에 이은 올여름 추리 소설 3탄
도무지 손에서 놓기 힘들만큼 간담이 서늘하고 시원했으니 효과는 역시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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