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다연바람숲 2017. 9. 5. 17:37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 page 25

 

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을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터울이 져서 그런지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돌봐 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었다.

 

                                                                                      - page 25~26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 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 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딸들은 기꺼이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 했다.

 

                                                                                      - page 35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page 69

 

김은영 씨가 스무 살이던 1999년에는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됐고, 김지영 씨가 스무 살이던 2001년에는 여성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여자'라는 꼬리표거 슬그머니 튀어나와 시선을 가리고, 뻗은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 page 72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page 100~ 101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 page 112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그동안 김지영 씨와 강혜수 씨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같은 이유였다. 두 사람을 더 신뢰해서가 아니라,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 page 122

 

첫째가 딸이라 둘째 성별을 알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다는 얘기, 아들을 가져서 시부모님께 당당해졌다는 얘기,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인 것을 알고 비싼 음식들을 마음껏 사다 먹었다는 얘기를 김지영 씨 또래의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김지영 씨는 나도 당당하고, 먹고 싶은 음식 다 잘 먹고 있다고, 그런 건 아이의 성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열등감으로 보일 분위기라 그만두었다.

 

                                                                                        - page 142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 page 145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깍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 page 149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 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

 

                                                                                         - page 151

 

 

 

 

*

 

 

나는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내리 아들 셋을 낳은 부모님이 고대하던 딸이었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딸이기 때문에 받는 부당함보다 딸이기 때문에 누린 호사가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남녀 합반을 제외하고, 남녀 성별로 갈린 고학년을 지나 여중을 나와 여고를 거쳐 여대를 졸업했다.

환경이 그러하다보니 학교 생활을 하는 내내 성별로 인한 차별이나 불합리와는 거리가 먼 그런 시절이었다.

 

이른 결혼때문에 짧은 직장 생활이었지만 직장 역시 여자들만의 세계였다.

결국 결혼 전까지 나는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불합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의 막내딸이 세상에서 귀하게 대우받고 당당할 수 있도록 귀하게 키워주셨다.

여자 아이라서 못할 것이 없었고, 여학생이라서 안되는 것이 없었고, 여자이기 때문에 포기할 일은 없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내가 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딸을 낳기위해 낳은 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던 건

내 또래, 아니 그 이전과 그 이후, 딸이라는 이유로 출생부터 타박받은 많은 여자들의 운명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해서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결혼 이후의 생활은 82년 김지영 씨의 세대보다 더 차별이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으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아내, 주부, 며느리, 워킹맘으로서의 여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깊이 공감을 한다.

아들을 낳아야 대우받고 당당한 시대를 살았고, 남자는 주방에 들여서는 안된다는 시어머니의 엄한 명 아래 살았고

자유분방한 사내의 삶에 토를 달거나 저항하면 안된다는 뼛속까지 가부장적인 제도 아래 길들여져 살았고

부부가 함께 바깥에서 일을 해도 육아와 가사는 온전히 여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속에 살았고

남자들이 유리할 땐 남존 우월주의를 부르짖다가도 여자의 노동력을 착취할 땐 남녀평등을 외쳐대는 시대를 살았다.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스스로 포기했던 삶에 대하여. . 우리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 말했듯 . . 체념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러한 여자의 일생이 미래의 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일지 몰라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언젠가는 성차별의 논리가 사라질 거라 믿는다.

학교에서 우등의 자리를 지키던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말단으로 밀려나지않는 시대가 올 거라 믿는다.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우리가 멀고 먼 옛날 이야기를 하듯 먼 과거의 이야기로 들려질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여자이기때문에 차별을 받으며 살았으나 적어도 그 악습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우리같은 징검돌 세대를 지나면

시대도 세상도 많이 달라질거라는 기대를한다. 그럴 것이고 그래야 한다. 적어도 내 아이들의 세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