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이라도 사고방식 하나로 변하는 경우는 세상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분명 제가 사직을 결심한 것은 마나미의 죽음이 원인입니다. 하지만 만약 마나미의 죽음이 정말 사고사였다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리고 제가 저지른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교사직을 계속 했을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직하는가?
미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어미로서 A도 B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교사이기도 합니다. 경찰에 진상을 알리고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지만, 교사에게는 아이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기를 의식하나요?
괴어있거나, 맑거나, 막혀 있거나, 흐르고 있는...., 공기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기운이 모인 집합체라고 생각해요. 그 공기를 매일 답답할 정도로 의식하고 마는 것은 제가 집합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인간의 뇌는 원래 뭐든지 열심히 기억하려고 노력한단다. 하지만 어디든 기록을 남기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하고 잊을 수 있거든. 즐거운 기억은 머릿속에 남겨두고, 힘든 기억은 글로 적고 잊어버리렴.
마음이 약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상처 입힌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견뎌내든지,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걸까?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좁지 않다.지금 있는 곳에서 살기가 고통스럽다면 다른 곳으로 피난해도 되지 않을까.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는 일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다. 드넓은 세상에는 반드시 자신을 받아들여줄 장소가 있다고 믿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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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살인자
더 어린 희생자...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여교사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살의는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은 A, 살의는 없었지만 직접 죽이게 된 B.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속한 가정과 학교, 남겨진 학생들... 그들을 둘러싼 그들의 이야기를 각자 그들의 고백을 통해 옴니버스로 펼쳐놓은 소설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집필 전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력서를 작성해 캐릭터의 성격을 세세하게 설정하고 일단 이력이 결정되면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 소설 속의 인물들도 각자의 설정된 자리에서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소설의 성격상 이유와 변명 혹은 자기 변호식의 고백을 담담하게 그러나 차갑게 털어놓는다.
죄를 모르고 벌을 받고자 하는 자.
죄는 있으나 죄의 무거움을 모르는 자.
자신의 죄는 모르고 타인의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자.
죄를 벌하고자 스스로 죄인이 되는 자.
죄와 벌에 대하여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 가능하며 어떻게 그 자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끝내 교사로서가 아닌 어머니로서 딸을 죽인 제자를 단죄하는 여교사에게, 딸을 잃은 어머니에게, 우린 과연 어떤 비난을 할 수 있을것인가.
소설인데 실화같은 이야기.
실화같지만 절대 현실은 아니었으면싶은 이야기.
픽션과 논픽션을 혼돈해야할만큼 몰입을 의도한 책이라면 정말 잘 쓰여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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