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후라발

다연바람숲 2017. 2. 3. 22:12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age 9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page 10~11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page 18~19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page 38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밖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page 68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레그레 수스 아드 푸트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progressus ad originem - 근원으로의 전진이라는 뜻

*regressus ad futurum - 미래로의 후퇴라는 뜻

 

- page 70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 page 75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page 85~86

 

*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매 장 마다 거의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한탸는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이다. 삼십오 년째 지하의 일터에서 책을 압축하는 일을 하면서 독서는 그를 지하세계의 소외된 노동으로 부터 구해주었고 그의 말처럼 그를 뜻하지않게 교양을 쌓게하였으며 현자가 되게 하였다.

 

책을 사랑하고 책을 존중하며 책을 신성시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책을 파괴하는 일을 해야하는 그에게, 책을 압축시키는 행위는 곧 그 자신의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전쟁의 위태로운 시대를 살며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사랑은 빗나가고 어긋나고 멀어져 갔으며, 단순히 책 가까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이유로 햇빛도 들지않는 지하실의 노동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던 남자,

 

지하세계 쥐들의 전쟁마저도 철학적으로 관조하는 남자, 고된 노동의 유일한 위안으로 맥주를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던 남자, 폐지더미를 예술로 포장하고 거기 철학적인 책을 넣어 작품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남자,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기술에 밀려 압축기를 떠나는 대신, 은퇴 후에도 함께하고 싶었던 압축기 속에서 끝내 책과 운명을 같이하는 선택을 한 남자, 마지막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연민, 어린 짚시의 이름을 기억한 남자,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고자 혼자임을 택했지만 내면의 철학적인 고뇌들이 끝없이 시끄러웠던 남자,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철저하게 고독했던 남자, 이 소설은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그의 말투로 들려주고 있다. 어둡고 암울하나 결코 불행하지 않으며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시끄러운 고독이 비로소 고요해졌을 것이므로 그를 위안하고 싶어진다. 하늘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한탸, 그는 비로소 잊고 있던 그 연민을 찾았을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작가인 흐라발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낯선 작가였지만 오로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다. 더 음미해야할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체코의 국민작가인 보후밀 후라발이라는 작가를 알게된 것만으로도 뜻깊은 책읽기가 되었다.

 

책의 페이지 어딘가에 이런 말이 있었다.

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다!

 

영원도 무한도 결국 한탸, 그를 당해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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