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다연바람숲 2017. 5. 12. 16:40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배신, 우리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없는 질문이다. 대답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보자. 대답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이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것만 상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바련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디는 것이다.

 

그녀는 늙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 es muss sein! " 이 피안 (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

 

인간의 삶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