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두근두근 내 인생 / 김애란

다연바람숲 2015. 12. 16. 16:50

 

 

 

살면서 우리가 찾아헤매는 해답은 때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어느 때는 문제 자체가 정답과는 별 상관없는 맥락에서 출제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page 30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 . ."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page 50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그 입구에 서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page 67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그러자 뜻밖에도 방금 전까지 쩔쩔맸던 문제의 실마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page 79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page 96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서 좋은 점에 대해 생각해요. 세상에 하느님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따로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거꾸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따로 있지 않을까 하고...... 그게 결코 하느님을 능가할 만한 일은 못되더라도, 하느님도 부러워할 만한 몸짓들이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page 136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page 143

 

"그 애들, 앞으로도 그러고 살겠죠? 거절당하고 실망하고, 수치를 느끼고,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을 해보고."

"아마 그렇겠지?"

"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어, 그러니까...... 저는...... 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 "

"실패해보고 싶었어요. 실망하고, 그러고, 나도 그렇게 크게 울어보고 싶었어요."

 

                                                                                                page 172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물결 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너, 예쁜 단어였구나........'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빛을 추파라고 하다니,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러자 곧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바람이 나를 보고 속삭였다.

'가을 다음엔 바로 겨울이니까."

불모와 가사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절이라고....... 귓가를 뱅뱅 돈 뒤 사라졌다. 나는 오래 전 추파를 추파라 부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만 웃었다.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는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page 198~196

 

"근데 또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지. 여자는 궁금하지."

"그런데 있죠. 그애 편지를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이미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새 말이 배우고 싶다고."

 

                                                                                                page 214

 

"나이란 건 말이다. 진짜 한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 내 나이쯤 살다보면...... 음, 세월이 내 몸에서 기름기 쪽 빼가고 겨우 한줌, 진짜 요만큼, 깨달음을 주는데 말이다. 그게 또 대단한 게 아니에요. 가만 봄 내가 이미 한번 들어봤거나 익히 알던 말들이고, 죄다."

"그럼 저도 지금 아는 것을 나중에 한번 더 알게 돼요?"

"그럼."

"근데 그게 달라요?"

"당연하지"

 

                                                                                               page 299

 

 

 

 

 

*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알 수 있는 생이란 없었다.

숙제처럼 그 나이에 맞는 인생이 주어졌고 하나의 해답을 풀다보면,

또 다른 삶의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떤 나이로 오늘을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생이 어떤 나이로 다가오는가가 더 명확한 때도 있었다.

 

나이 열일곱,

신체 나이 여든살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자꾸만 울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죽음과 절망과 슬픔마저도 생의 한 몸이라는 걸 절감했기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