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호미 / 박완서 산문집

다연바람숲 2015. 11. 9. 13:17

 

 

 

칠십 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그 물소리는 마치 모든 건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작년에 그 씨를 받을 때는 씨가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마침내 침묵의 계율이 풀렸다. 혀가 풀리자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포옹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침묵이 터뜨린 폭죽이었다. 침묵이 피워낸 백화난만한 꽃밭.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들판의 모든 것들, 시방 죽어있지만 곧 살아날 것들, 아직 살아있지만 곧 죽을 것들, 사소한 것들 속에 깃든 계절의 엄혹한 순환,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인 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 '너는 나 같은 세상을 살지 마라' 였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라는 비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경험한 기도의 묘미는 잗다란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데 더 큰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큰 기도는 과욕이나 허욕 아니면 신의 영역을 넘보는 기도였으니 안 들어주시는 게 당연하고, 잗다란 기도는 잔근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런 잗다란 근심은 기도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게 되니까 들어주실 수밖에. 

 

한글을 가르치는 건 내 취미 생활이자 내 자식에 대한 의무였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아마 점점 비우호적인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림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동물과 식물 곤충하고까지 소통을 나눌 수 있는 한없이 놀랍고 아름답고 우호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이 되길 바랐다. 

 

다들 멈춰 선다. 한 번도 멈춰 선 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쁜 사람들이 멈춰 서 있다. 생전 처음 멈춰 서 보는 것처럼 스스로 어색해하면서도 행복하게 멈춰 선다. 나는 멈춰 섬을 멈추고 한발 물러나 내남직없이 바쁜, 어쩌면 바쁜척이라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멈춰 섰다 움직였다 하는 걸 바라본다. 나의 멈춰 섰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순간도 그리움이 되면 길어진다. 나의 일상의 쫓기는 시간들, 아무것도 안 할 때조차 숨가쁘게 그러나 승산 없이 달려가는 나날에도 잠시 멈춰 서는 서늘한 여유를 도입해보고 싶어진다.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