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봉순이 언니 / 공지영

다연바람숲 2015. 12. 24. 17:33

 

 

 

오빠가 딱지를 가지고 한 번 골목길을 나섰다가 왜 다시는 그 골목길에서 놀지 않고 과외친구들하고만 어울리는지도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낀 놀이에서 한 번도 술래를 벗어날 수 없는 그 외로움, 규칙을 정확히 지켜 놀이에 끼여도 아이들에게 파울의 인정을 받는 외로움, 그도 아니면 아이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버리는 동안 낙서가 가득한 벽에 두 눈을 가리고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로 서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우며 어둠 속에서 견뎌야 하는 외로움, 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술래인 채로 그들과 노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심심한 것은 싫었다.

 

                                                                                                          page 52~53

 

그때 깨달아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규칙을 지켜도 끝내 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그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나는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고 규칙은 결국 공정함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회피, 그러므로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page 56~57

 

아마도 그때 알아야 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다른 바향으로 나 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이렇게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의 지도에 이미 내 인생이 그려져 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 하는 실수와 내가 자주 겪는 슬픔과 내가 머뭇거리다 돌이키지 못한 정황들이, 인생은 이미 그때 내게 나침반을 표시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상징적으로 압축된 상태도 아니었고 암호로 가득찬 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암호와 상징들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세월은 한번 가면 그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막연히 믿었던, 그래서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같은 삶을 같은 항아리 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page 103~104

 

그러나 그후 나는 생각을 바꾸었던 것 같다. 그래,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봉순이 언니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page 148~149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page 162~163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한 번 남자와 도망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달라. 뭔가 운명을 느꼈다니까. 가엾어서, 그러고 있는 게 가엾어서 내가 도와주고 싶었어. 밥도 따끈하게 퍼주고 셔츠 깃도 깨끗하게 빨아주고 저녁에 돌아오면 대야에 물 데워서 따끈한 물에 발도 닦아주고 싶어. 게다가 엄마 손 한 번 못느껴본 그 가엾은 아이들이라니. .....

나는 안다 그랬을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 누구나 고아처럼 느껴지는 그 푸르스름한 순간에 그녀는 우는 아이를 안아주었으리라. 아이의 눈에 세상이 다시 노르스름하고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누군가 왕사탕을 내밀면 그것을 반으로 잘라 다시 입에 넣어주며 웃었으리라. 나누어 먹어야 맛있는 거야.

 

                                                                                                          page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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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언니들이 있던 세상을 살았다.

공단의 공중전화에서 울던 언니들의 이야기가 신춘문예의 시 속에서조차 서걱거리고,

뒤늦게 막내와 함께 들어간 초등학교도 졸업못하고 어느 날 방직공장으로 떠나간 언니들이 있던 시절,

그 언니들이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이름을 바꿔가는 동안 나도 그녀들의 나이를 지나며 살아왔다.

 

아무도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되는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아서,

아무도 사랑에 목숨 걸면안되는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아서,

세상에 대한 의심도 없이, 그저 착하게 운명이라 믿으며사랑에 목숨 걸고 살았던,

 

여자.

바보같은 여자.

 

세상의 그 많은 봉순언니들은 지금쯤 어디서 짱아같은 손주들을 가슴에 품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