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12월 청주 다연, 창 밖엔 눈이 오고요

다연바람숲 2014. 12. 21. 17:56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하염없이 눈 내리는 창밖을 보다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떠올립니다.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기억하고 있었는 줄도 모르게 기억하고 있던 문장들이

자꾸만 하얗게 변해가는 풍경과

그 풍경 속에 오도마니 고립되고 있는 불빛같은 내게

조그맣고 고요한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

한계령의 한계에 못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그리하여 구조헬기가 나타나도,

날은 어두워지고 공포와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와도,

결코 구조의 손을 흔들지않을 것이며

옷자락이 보일라 꽁꽁 숨어버렸으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싶은 간절함때문이겠지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거나

혼자 간직한 외사랑의 사람이거나

한겨울 못잊을 사람이니,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난생 처음 짧은 축복이니,

한계에 발이 아닌 운명이 묶이고싶은 것이겠지요.

 

소복소복 저렇게 찰지게 눈이 내리면

 

한겨울 못잊을 사람은 없어도,

사랑해서 기꺼이 함께 눈 속에 고립되고싶은 사람은 없어도,

 

사방 온통 흰 것 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닌 운명이 묶여봤으면...

한계가 한계가 아닌 축복이 되었으면...

 

그런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함박눈은 내리고 내려서 쌓이고

그 위로 푸른 빛의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