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은교

다연바람숲 2012. 4. 27. 16:14

 

 

 

나는 늘 왜, 라고 묻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왜 너를 만났는가. 나는 왜 네게 빠져들어 갔는가. 나는 왜 너를 이쁘다고 생각하는가. 아, 나는 왜 불과 같이, 너를 갖고 싶었던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질문이겠지.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쉽게 설명하자면,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근본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다. 절대, 해서는 안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장으로 하나의 에민한 악기를 만들려고 했다"라고 말한 건 <좁은 문>을 쓴 프랑스 작가 지드다. 그 말은 문학이 빈 보자기 속에서 태연히 비둘기를 끄집어내는 식의 마술을 꿈꾼다는 말과 다름없는데, 마술과 달리 문학은 속임수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죽음은 삶의 한 가지 에피소드처럼, 끝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갔다" 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나는 친애하는 톨스토이에게 기꺼이 동의했다. 멸망은 필연이다. 받아들여 그것을 친구로 삼는다면 최상의 죽음을 얻을 것이다.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내가 스탕달의 말을 인용하자 서지우는 큭, 웃었다. "선생님, 요즘엔 뽀뽀도 그냥 하는 세상이에요." "그럴테지" 나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서지우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은교의 손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보들레르는 노래했다.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 c.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 에서

 

 

 

내 마음 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

 

나의 마지막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비참하지도 않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  박범신 장편소설 <은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