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다연바람숲 2012. 9. 4. 09:08

 

 

 

10 #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받기엔 바람부는 날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 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2 #

 

끌리는 것 말고

반대의 것을 보라는 말.

 

시를 버리고 갔다가

시처럼 돌아오라는 말.

 

선배의 그 말을 듣다가

눈이 벌게져서 혼났던 밤.

 

 

13 #

 

나는 너를 반만 신뢰하겠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너를 절반만 떼어내겠다.

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4 #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19 #

 

언젠가는 그 길에서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매고 추웠는데,

긴 한숨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빽한 길이 있고

오히려 돌고 돌아 가야 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아닌 길.

 

 

38 #

 

등대

 

 

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39 #

 

당신한테 나는

 

당신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 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절대로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

 

 

페이지가 없다.

그 흔한 목차도 없다.

아무 정해 놓은 것이 없으니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읽는 법조차 자유롭다.

문득 아무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그와 동행이다.

그의 목소리, 그의 걸음을 놓치는 일이 없다.

 

서서히 그의 감정에 묻어 가는 것,

서서히 그의 색깔에 물들어 가는 것,

그를 스쳐간 바람에게서 슬픔의 냄새를 맡는 걸 보면

하마

가을이 온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