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사랑이라니, 선영아 - 김연수

다연바람숲 2012. 11. 26. 20:19

 

 

 

 

 

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 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항공우주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그건 우리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사랑은 우리의 평생 교육기관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입학할 수 있는 성인들의 학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 우리는 계속 낙제할 수밖에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할테니, 결국 우리가 그 학교에서 졸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에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김연수 < 사랑이라니, 선영아 > 중에서 

 

 

 

사랑의 덧셈도 뺄셈도 곱셈도 나눗셈도

모든 공식이 결국은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않는한 사랑의 모든 공식은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이별이 빼기고 나누기라면 기억은 덧셈이고 곱셈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슬퍼마시라

사랑한 누군가가 떠나가도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는한 사랑은 완성이다.

오래 더하고 곱해질 수 있는 기억을 남겨두었다면 혼자 음미하는 추억도 사랑공식의 연장이다.

그러니 사랑이여

밖으로만 향하는 화살의 방향을 돌려 자신을 향해 겨누시라.

그리고 그 누구보다 더 열렬히 스스로를 사랑하시라. 깊이 사랑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