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바보엄마 / 최문정

다연바람숲 2012. 3. 30. 23:07

 

 

 

" 사랑이라..... 사랑이 존재하기는 하나요?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을 위한 완벽한 희생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세상에 상대방을 위한 완벽한 희생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나요? 아뇨, 존재하지 않아요. 모두들 그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인정하기가 두려운 거죠.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랑이 사라져버릴까봐.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랑이 존재한다는 증거에 매달리는 거겠죠. 바보처럼 자기 목숨까지 버리며 사랑을 이룬 기적 같은 이야기에 환호하죠. 세상의 모든 소설, 드라마, 영화들이 사랑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느라 안달이에요. 우습죠? 이젠 고전이 되어버린 로맨스 소설을 쓴 브론테 자매들은 평생 홀로 살았는데 말이에요.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작가로 꼽히는 여자가 인터뷰에서 말하더군요. 연애를 하면 현실에 눌려 대본을 쓸 수가 없다고.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으세요? 아뇨, 같아요. ..."

 

 

"엄마는 나랑 절반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겠죠? 나에게 절반의 유전자를 물려준 사람이 엄마일 테니까. 그런데도 난 엄마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절반이 아니라 100만분의 1조차도. 엄마도 그럴 거예요. 날 절대 이해할 수 없겠죠."

 

 

난 절대 우리 엄마같은 엄마는 안될 거야.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난 절대 우리 딸에게 그런 소리는 안들을 거야.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도 다른 엄마들과 똑같았다. 그녀가 그랬듯이 ....

 

 

"별도 새로 생겨나?"

"그럼.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그래. 보통 새로 생겨나는 별들은 쌍성인 경우가 많아. 모성, 그러니까 엄마별을 갉아먹으면서 태어나는 거지. 엄마별의 먼지, 바위, 에너지들을 전부 끌어당겨서 자기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그럼 엄마별은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에너지를 다 잃고 죽어버리는 거지. 차갑게 식어가면서. 더 빛날 수 없으니 죽은 거라고 볼 수 있겠지. 결국 저 거대한 별조차도 그렇게 죽어간다는 게 참 허무하지 않아? 그것도 자식한테 먹혀서."

"그래도 엄마별은 행복할 거야. 비록 자신은 죽어가지만 바로 옆에서 밝게 빛날 자식이 있어서 행복할 거야."

 

 

"닻별이 엄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나봐요."

"예?"

"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사랑에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거든요, 그 사람이 똑똑해서도, 그 사람이 예뻐서도, 착해서도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지.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이유가 있는 사랑이라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도 없어질 테니까. 그런데 애초에 이유가 없다면 사랑도 사라질 수 없겠죠."

 

 

내 인생에서 불행은 이제 끝이었다. 더 이상 생길 불행의 종류도 떨어졌을 테니까. 그 생각에 픽 웃었다. 지나버린 불행에 웃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은 거였다.

 

 

"... 널 왜 사랑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유가 없어. 처음부터, 네가 생긴 그 순간부터 그냥 널 사랑했으니까. 그냥 널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 바보같지."

그게 엄마였다.  바보와 동의어.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가 했던 '네 자식을 낳아 보면 알 거다'라는 말도 이젠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매일 밖에 나가지. 그런데 엄마 인생을 위해서 나가는 일은 없었어.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가고, 밥을 먹어야 하니까 마트에 가고.... 이상하게도 엄마를 보고있으면 답답했어. 갇혀있는 사람 같았거든. 내가 엄마를 세상에 묶어 두는 닻이라고 했었나? 그런데 나는 내가 엄마를 가두고 있는 감옥처럼 느껴졌어. 나 때문에 돈 버느라 힘들고, 나 때문에 끔찍한 결혼생활 버티느라 아프고... 그래, 어쩌면 엄마 말처럼 내가 엄마의 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닻이 너무 무거우면 아무 데도 못가니까. 그러니까 이젠 조금 가벼운 닻이 될께. 엄마가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언젠가 내가 했던 생각들이,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닻별이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어쩌면 상처는 이렇게 되풀이되는 걸까. 어떻게 고통은 이렇게 어김없이 반복되는 걸까. 그래도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껴안고 자라나니 다행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만 좋아하는 엄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우스웠다. 어쩌면 한 번도 그 쉬운 거짓말들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엄마는 그런 손해나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엄마니까. 그게 답이었다. 그 많은 질문들의 답은 하나였다. 엄마니까. 하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하나가 맴돌고 있었다.엄마는 내게 얼마나 더 많은 거짓말들을 했을까. 나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삼키며 거짓말을 했을까.

 

 

벚꽃의 꽃말은 '거짓말'이다. 물론 다른 꽃말도 있지만 , 그 꽃말처럼 벚꽃에 잘 어울리는 꽃말은 없다. 하룻밤에 피어올라 온 세상을 풍성하게 뒤덮다가 하룻밤에 져버리는 벚꽃은 꿈처럼 허무하다. 그래서 내게 벚꽃은 거짓말이다. 꿈이 거짓의 동의어인 것처럼.

 

 

"깨어날 거예요. 분명 깨어날 거예요. 우리 엄마 한 번도 내가 원한 거 싫다고 거절해 본 적 없어요. 내가 원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줬어요. 그러니까 깨어날 거예요. 내가 원하니까 깨어날 거예요."

"엄마는 나 안 떠나요. 아니, 엄마는 나 못 떠나요. 다른 사람 전부 나 떠나도 엄마는 나 못 떠나요. 그러니까 깨어날 거예요....."

 

 

엄마. 다음 생이 있다면 내 엄마로 태어나 줄래?

그 모습 그대로 내 엄마로 다시 태어나 줄래?

그러면 그때는 자랑스럽게 말할게.

세상 모두에게 큰 소리로 외칠게.

이 사람이 내 엄마라고.

이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당신들한테는 미친 바보로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내 엄마로 다시 태어나 줄래?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

 

울면서 책을 읽었다.

내 어머니와 나와 내 딸들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져서 가슴이 자꾸만 시렸다.

아직도 이 막내 딸이라면 엄마별처럼 내어줄 줄 밖엔 모르는 내 엄마와

생긴 그 순간부터 나의 사는 이유가 되어버린 내 아이들과

결국엔  바보엄마일 수 밖에 없는 나의 이야기 같아서

아주 오래 펑펑 울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