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긴 하루를 밖에서 보내고 돌아온 어느 날 저녁이었어.
호텔방에 들어가 보니, 그녀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호텔 편지지에 뭔가를 쓰고 있더구나.
이미 작고 빽빽한 글씨로 여남은 장의 편지지를 채운 뒤였어.
내가 그녀의 목으로 고개를 기울이면서 물었지.
"누구에게 그렇게 편지를 쓰는 거야?"
"당신한테요!"
"나한테?"
그 순간, 이 여자가 나를 떠나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
그러자 벌써부터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당신 왜 그래요? 얼굴이 몹시 창백해요. 어디 아파요?"
"왜 나한테 편지를 쓰는 거지?"
"아, 사실은 당신한테 편지를 쓰는 거라기 보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편지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지. 책상 위에도 있었고, 그녀의 발치와 침대 위에도 있었지.
나는 손 닿는 대로 아무거나 한장을 집어들고 읽어보았어.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먹기, 새우와 크로와상과 쫀득한 쌀밥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가게 진열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기, 지하철 타기, 열차시각 확인하기, 둘이 앉는 자리를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옆으로 떼밀기, 빨래 널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기, 베이루트와 비엔나에 가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바비큐 해먹기, 당신이 깜박 잊고 숯을 안 가져왔다고 볼멘 소리 하기, 당신과 동시에 양치질 하기, 당신 팬티 사주기, 잔디 깎기, 당신 어깨 너머로 신문 읽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루아르 지방과 헌터 밸리의 포도주 저장고 견학하기, 바보처럼 굴기, 재잘거리기,
당신에게 마르타와 티노 소개하기, 오디 따기, 요리하기, 베트남에 가서 다시 아오자이 입어보기, 정원 가꾸기, 당신이 코를 골며 잘 때 시끄럽다고 투덜대며 쿡쿡 찌르기, 동물원과 벼룩시장에 가기, 파리와 런던과 멜로즈에 가기, 런던의 피커딜리 거리에서 돌아다니기, 당신에게 노래 불러주기, 담배 끊기, 당신에게 손톱 깎으라고 요구하기, 그릇 사기, 우스꽝스러운 물건들과 아무 쓸모 없는 물건들 사기, 아이스크림 먹기, 사람들 바라보기, 체스에서 당신을 이기기, 재즈와 레게 음악 듣기, 맘보와 차차차 추기, 심심하다고 투정부리기, 변덕부리기, 뽀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당신을 놀리기, 소들이 보이는 곳에 있는 집 찾으러 다니기, 점잖지 못한 물건들로 쇼핑 카트 채우기, 천장에 페인트칠 하기, 커튼 꿰매기, 재미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 동안 식탁에 앉아 있기,
당신의 짤막한 턱수염을 잡고 당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기, 당신 머리 깎아주기, 잡초 뽑기, 세차하기, 바다 보기, 시시한 옛날 영화 다시 보기, 공연히 당신 이름 불러 보기, 당신에게 야한 농담 하기, 뜨개질 배워서 당신에게 목도리 떠 주기, 그랬다가 보기 흉하다고 다시 풀어 버리기, 주인 없는 고양이와 개를 거두어 먹이기, 앵무새와 코끼리에게 먹이 주기, 자전거를 빌려서 타지 않고 그냥 놓아 두기, 해먹에 누워 있기, 그늘에서 마르가리타 마시기, 게임하면서 속임수 쓰기, 다리미 사용법 배우기, 다리미를 창문 너머로 내던지기, 빗속에서 노래 부르기, 관광객들 피해 다니기, 술에 취하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때로는 거짓말이 약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당신 말에 귀 기울이기, 당신에게 손 내밀기, 버렸던 다리미 다시 찾아오기, 대중 가요의 가사를 음미하기, 자명종 맞춰 놓기, 우리 여행 가방 챙기는 거 잊어버리기, 조깅 며칠 하다가 그만 두기, 쓰레기통 비우기, 당신이 날 여전히 사랑하는지 물어보기, 이웃집 여자랑 수다떨기, 당신에게 바레인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들려주기, 내 유모의 반지와 헤나(부채꽃과의 열대식물) 냄새와 호박으로 된 동글동글한 장신구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계란 반숙이나 커피 따위에 적셔 먹을 길고 가느다란 빵 조각 만들기, 잼 단지에 붙일 딱지 만들기......
안나 가발다 <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중에서
*
아직도 사랑은 특별한 것이라서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씩 묻고싶어진다
당신의 삶도 그렇게 특별한가요? 라고.
어깨를 부딪치며 함께 한끼의 식사를 준비하고
마주 보며 함께 한끼의 식사를 먹고
서로의 입맛에 맞는 차한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편안하게 상대방의 무릎을 베고누워 얼굴을 바라보고
누구의 취향에 맞는 채널이든 함께 티비를 보고...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사소한 저녁 한때의 일상조차 사랑의 일이고 방식이란 걸
그 함께 할 누군가를 잃고나서야 깨닫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씩 말하고싶어진다
사랑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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