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내게 요구하지 마라, 사랑이여, 이것이 첫사랑이기를

다연바람숲 2012. 3. 8. 00:03

 

미미 칼바티(Mimi Khalvati)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라났으며 영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필자는 최근 미국 아이오와 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미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두 나라의 말과 문화적 차이와 두 세기에 걸친 역사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녀는 영국에 살면서 영어로 시를 쓰지만 영국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란 말인 페르시아 말도, 이란 식의 생활방식도 모르니 이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더듬거리며 의사소통을 해야 하고 혹시 잘못 듣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해야 하는 나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언어인 영어로 복잡한 문제를 섬세하게 말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언어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미미의 처지를 들으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호텔에 딸린 작은 식당에서 매일 같은 아침 식사 즉, 커피와 우유, 식빵, 인스턴트 오트밀과 사과를 먹다가 질려서 하루는 내가 우리 한국에서는 매일 아침 뜨거운 국을 먹는다, 라고 했더니 미미가 건강에 좋기 때문이냐 물었다. 나는 아니, 그냥 우리의 습관이다, 라고 했더니 그에게는 그것이 충격적인 말로 들렸나 보다. 미미는 이란의 몸과 피부를 가졌지만 이란의 관습도 모르고 영어를 쓰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자기를 영국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위로하느라 그렇지만 너는 시가 너의 나라가 아니냐, 라고 말했더니 그렇다, 나는 시 속에서 나의 나라를 찾을 수밖에 없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 시를 읽게 되었다.





모든 아름다운 사랑의 시가 그렇듯이 시가 지니는 깊이에 따라 한 사랑은 또 다른 큰 사랑으로 확대되어 한 개인에 관한 사랑의 시는 동시에 한 나라 전체, 한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로 해석이 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그 예이고, 이 시 또한 그렇다.
사랑이 가버린 다음의 마음과 침묵을 응시하면서, 그것이 변한 사랑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며, 사랑이 가버린 다음의 침묵은 우리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빛나는 태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쓰라린 침묵임을 말한다. 그 속에서 시인은 다시 묻는다. 지금까지의 사랑이 어떠한 것이었나를, 모든 봄과 모든 꽃과 모든 봉오리만이 사랑이며 그 다음은 그저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으나,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나. 여름은 도대체 홍수 속의 가득한 슬픔으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시인은 아름다운 장미 덤불과 꽃들을 남의 집 문앞에만 서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냥 지나쳐 왔다고 한다.
그렇다. 그가 태어난 그의 조국 이란은 수세기 동안 아름다운 무늬의 카펫과 실크와 벨벳과 수직을 짜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 마을은 이제 전쟁의 땅으로 거리마다 마을마다 피가 흐르며 그 피의 역사는 거리를 흐르며 마을을 수직처럼 짜고 다친 몸뚱이들은 쓰라리게 익어가며 그들의 삶을 피의 역사에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전쟁을 위해 지불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 일생 동안 이 세계를 몸 바쳐 사랑하기에만도 우리의 시간은 부족하다. 전쟁을 위해 바칠 시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어법은 이렇듯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여러 겹의 차원으로 마치 실로 무늬를 놓듯 짜나가는 형식이다. 사실 단정적이고 단순한 긍정 혹은 부정의 어법은 위험하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시 말한다. 이란의 북쪽 지방에 건설되고 있는 세필드 루드의 댐, 그 물을 막아두기 위해 건설되는 댐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물을 막아두려고 건설하는 것인가, 시인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막아두었다가 흘려야 하는가. 잠시 막아두었다가 영원히 흘리게 될 눈물이라면 차라리 막아두지 않는 게 낫지 않는가. 이 전쟁의 땅, 이 전쟁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최정례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0년『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후 시집『내 귓속의 장대나무』『햇빛 속에 호랑이』『붉은 밭』을 펴냈다. 제10회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고려대 강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