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내게 사랑의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내게 남겨진 건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내게 새겨진 건 사람이 준 상처이며 기록된 건 사랑이 아니라 환멸의 언어들이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혼의 자기장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따스함, 열정, 몰입, 기쁨, 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 같은 것들이 수면 아래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나로서는 그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하고 그 이면의 온갖 것들과 새로이 대면하고서야 비명을 지르는 그런 기억 상실증 환자 같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왜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정미경, <나의 피투성이 연인>- 호텔 유로 1203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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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결과적으로 똑같은 상처와 흉터를 남기면서도
사랑에 있어서 사람들은 얼마나 지독한 기억상실증 환자들인지
상처를 반복하면서도 고집불통 면역되지않는 심장을 가졌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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