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삶의 표층 아래로의 망명 / 전경린

다연바람숲 2012. 3. 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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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틀림없이 허공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적막이었다. 어떤 자리에서, 언제 가장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어떤 이는 여행 중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아침 식사를 할 때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열심히 일할 때라고 하고 어떤 이는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라고 했는데, 나는 인적 없는 풍경을 오래 바라볼 때라고 말했다. 산 속에서나, 안개 낀 강변에서나, 혹은 바닷가 길을 차를 타고 가면서나, 배를 타고 있을 때나…. 두 눈 속에 적막한 풍경이 가득 차고, 그 풍경에 내 넋을 주어버릴 때.

 

이런 성향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홀로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책을 남달리 많이 읽었다거나, 노트에 글을 썼다거나,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공백 속에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건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단지 자기 방에 틀어박히기를 좋아하고, 조금 더 침울하고 예민해 보일 뿐 지극히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서른 세 살에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은 스스로에게까지 숨겨온 끔찍한 비밀을 누설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결심이었다. 자신을 갈기갈기 나누어 삶 속에 섞여 무던하게 살아보려 했던, 성년기 이후의 처참한 노력을 단념하고, 삶의 표층 아래로 망명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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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이 삶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통로를 구하려 한다. 신이든, 사랑이든, 이타적 헌신이든, 업무를 업적으로까지 발전시키는 열정이든, 그것은 삶을 넘어가기 위해 의지하는 저마다의 방법이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생존이라는 목을 죄는 짧은 사슬을 잊을 수 있는 저마다의 초월이 필요하다. 내게 그것은 글쓰기였다. 그 외에 삶은 저절로 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토록 자연스럽고 그처럼 쉽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글을 쓰면서 나이 드는 동안 나도 이제 삶의 지엄함과 사람의 다정함을 알게 되었다. 이 질기고 무상한 삶은 욕구로 사는 것도 아니고 왜, 무엇을 위해서, 같은 질문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생명 가진 것들의 긍정적 체온과 소망과 인내로 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소박하고 외지고 따스하고 그립고 힘겹다. 그리고 이 구태의연한 단어들처럼, 수선이 필요할 만큼 낡고 퇴색하고 닳아 빠지고 지친 것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못박힌 가슴처럼 숨쉬는 것조차 저릿하게 아파 온다.

 

 

전경린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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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끝내 망명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고 내 숨겨온 비밀을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으므로

내 자유로운 소통의 문은 아직도 단단히 잠금 상태이다. 

내 말은  언제나 삶의 표층 위에 겉도는 그저 그런 끄적임,

그러므로 시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서 멀어지는 연인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