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토니 타키타니’에서 고독을,
심보선의 시 ‘매혹’에서 행복의 진정성을 찾다
토니 타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깊은 습관으로서의 고독에 익숙해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뒤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사랑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타키타니’(<렉싱턴의 유령>)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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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토니의 청혼을 받아들여 둘은 결혼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죽는다.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바꿔놓고는 그렇게 떠나가버렸다. 이제 그는 그녀를 만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일은 두 배의 고통이다. “말하자면 나는 주변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되돌아간다. “토니 타키타니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외톨이가 되었다.”
무라카미는 앞에서 인용한 두 문장에서 ‘압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고독을 공기와도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치카와 준 감독은 2004년에 소설 ‘토니 타키타니’를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냈는데, 이 영화의 국내판 DVD 케이스에는 남녀 주인공이 각자 텅 빈 방에 앉아 있다. 이 이미지는 소설의 전언을 명쾌하게 압축해낸다. 고독이 공기와도 같은 것이라면, 저 방은 지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가끔 밀려오는 것은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일 것이다. 그 텅 빈 (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세간을 들여놔도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필요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대체로 불행하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는 그 순간이라고,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72장)
최근에 읽은 아주 멋진 시에는 이런 행복의 이미지들이 있다.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목욕을 막 끝낸 여자의 어깨 위에 맺힌 물방울들/ 남자가 용기를 내 닦아주려 하자/ 더 작고 더 많은 구슬로 흩어지던 그것들/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한 줄기 미명과/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한 조각 어둠 (…)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서로를 이어주던/ 눈빛과 눈빛의 무수한 교차/ 그 위를 바삐 오가는 배고픈 거미처럼/ 새벽녘까지 끝날 줄 모르던 이야기/ 바로 그날 태고 적부터 지녀온/ 아침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환하고 낯선 하나의 세계.”
심보선의 시 ‘매혹’(<문학동네> 2010년 겨울호)의 후반부다. 목욕을 끝낸 여자의 어깨 위에 맺힌 물방울들을 닦아주던 때,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맞이한 아침이 더 이상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정도로 새롭게 느껴지던 때, 그때는 과연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진정으로 행복의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은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있어서가 아닌지. 그러니까 고독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어서 잠시 잊어먹을 수 있을 뿐이고, 행복은 늘 등 뒤에 있어서 단지 기억될 수 있을 뿐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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