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다연바람숲 2011. 4. 27. 22:19

 흐린 날은 /  장옥관 

 

  멀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의 허기 때문에
  몰랐던 안경알에 묻은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행복한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지나친 확신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도   

 

*

 

며칠째 흐린 날이었지요.

마음도 스산하니 오래 가라앉았었지요.

멀미가 날듯 속도전으로 잎을 키운 길 건너의 나무들은

그 가지 위의 허공을 이젠 완전하게 덮어가는 중이지요.

참 더디게 당도했던 계절이 가는 길은 왜 그리도 서두르는지

뒷꼭지 잡고 떼를 쓰고싶은 날에 흐릿하게 또 무던한 봄날이지요.

 

너무 밝은 봄날이어서

자꾸 문밖의 먼 곳만 바라보던 마음이

흐린 날에 가만이 앉아 가까이 있는 것들과 오래 눈을 맞추었지요.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흐린 날 눈 감으면 보이지요.

 

오독 난독 불치로 읽지못하던 사람의 마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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