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인류 최초의 여인 '릴리트'

다연바람숲 2006. 1. 5. 11:38
'인류 최초의 여자'라면 누구나 성서에 나오는 이브를 떠올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브는 여자의 원조가 아니다. 이브 이전에 릴리트라는 여자가 있었다. 아담의 조강지처도 이브가 아닌 릴리트라는 얘기다. 유대 신화를 보면 인류의 첫 번째 여자인 릴리트가 등장한다. 릴리트는 아담의 첫 번째 아내이며 남편의 갈비뼈에서 태어난 종속물이 아니라 아담처럼 흙으로 빚어졌다.
 
아름다운 릴리트는 현모양처 유형의 정숙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악영향을 끼친 음탕하고 사악한 아내였다. 순진한 아담이 릴리트의 유혹에 넘어가 악에 빠질 위험이 높아지자 신은 서둘러 릴리트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녀는 아담에게 순종하지 않은 죄로 신의 벌을 받아 악마로 변한 뒤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릴리트란 이름 자체도 불순한 의미를 지녔는데, 스티븐 랭던은 '릴리트'가 아름답고 섹시한 용모로 남자를 유혹하는 음란한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계 이름이라고 밝혔다.
 
인류 최최의 여자인 릴리트가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혐오감 때문이다. 남성 예술가들 역시 릴리트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육욕의 화신이요, 사탄의 사주를 받은 저주받은 요부로 묘사했다.
 

                     

                                       존 콜리어<릴리트>1887 캔버스에 유채                  

 

영국의 화가 존 콜리어의 그림을 보면 릴리트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알 수 있다

 

발가벗은 릴리트가 커다란 구렁이를 칭칭 감은 채 황홀경에 빠져 있다. 릴리트는 마치 연인을 애무하듯 징그러운 뱀과 성애를 즐긴다. 이처럼 매혹적인 누드와 사탄의 상징인 뱀을 한 쌍으로 묶은 것은 여성에 대한 갈망과 거부의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서다. 흉측한 뱀과 쾌락을 즐기는 음탕한 릴리트의 모습에서 여성은 악마의 동료로 사탄과 몸을 섞는 불길한 존재임을 실감할 수 있다.

 
존 콜리어는 낭만주의 시인 키츠에게 영감을 받아 이 매혹적인 그림을 그렸다. 키츠는 그의 시 '라미아'에서 릴리트를 황금빛과 초록색, 청색의 무늬가 박힌 현란한 뱀에 비유했다. 악마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키츠의 시는 상징주의와 팜므파탈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잔인하고 사악하며 남성을 무자비하게 파멸시키는 냉혹한 존재로 그렸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레이디 릴리트>1867 종이에 수채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여인, 릴리트의 관능성은 로제티의 그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로제티는 릴리트가 화장을 하는 감미로운 순간을 묘사했다. 거울을 보며 단장하는 여인의 이미지는 로제티 뿐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인데,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황홀경에 빠진 미인의 자기애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남성의 관음증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릴리트가 금발을 빗으며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릴리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홀려 좀처럼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불꺼진 초는 죽음을 의미하는 한편 신의 부재를 뜻한다. 탁자 위에는 몸체가 하트 형태요, 뚜껑은 왕관 모양인 분홍빛 병이 놓여 있다. 이 병은 여인의 미모에 홀려 가엾은 희생자가 된 남성의 심장을 은유한다. 배경은 꽃과 화려한 문양의 벽지와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다. 장미는 사랑과 정열을, 양귀비는 잠과 죽음을 상징한다.
 
모든 소도구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 성욕에 빠진 남성은 쾌락의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화가는 릴리트가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해 악의 소굴로 뻐뜨리는악마의 후손임을 증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트'가 세기말 팜므파탈의 원조가 된 사실이다. 릴리트의 우유빛 살결과 도톰한 붉은 입술, 금발의 긴 머리카락은 신비롭고 에로틱한 팜므 파탈의 선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로제티는 '사랑의 화가'로 불릴 만큼 평생 관능적인 미인들을 그렸다. 소위 '로제티표'로 불리는 그의 여인상들은 세기말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디자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만 아니라 대중들의 취향까지도 결정지을 정도였다. 당시 몸값이 비싼 고급 창부와 모델들 사이에서는 로제티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처럼 꾸며서 사진을 찍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로제티가 물꼬를 튼 요부의 이미지는 팜므 파탈로 계승되어 세기말에 눈부신 피부와 도발적인 표정의 욕정에 불타는 에로틱한 여인상이 대거 등장하였다.
 
세기말의 팜므파탈은 불가항력적으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 또 그녀들은 절대적인 미모만큼 강한 성욕으로 남성에게 마술을 걸어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사람들은 현실 속의 여자에게서 해소할 수 없는 끈끈한 욕망을 매력적인 팜므 파탈에 투영했다. 윤리 도덕을 뛰어넘고 싶은 은밀한 갈망을 팜므 파탈을 통해 충족시켰다.
 
릴리트는 서양 예술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제인 여성의 파괴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다. 최초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저주받은 팜므 파탈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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