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돼지가 되어라, 키르케

다연바람숲 2006. 1. 13. 17:03

 

향로의 언저리처럼 네 살결엔 향내가 감돌고

넌 저녁처럼 사람을 홀리는구나 검고 뜨거운 요정이여

 

요정 키르케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다. 그녀는 눈부신 미모를 지녔고 마법에도 능해 남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 키르케가 굴복시킨 가장 유명한 남성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중 키르케의 마력에 푹 빠져 처자식마저 잊고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오디세우스와 키르케의 첫 만남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키르케가 섬을 정찰하러 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마법으로 유혹해 몽땅 돼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오디세우스가 헤르메스 신의 도움을 받아 키르케의 마법을 물리치자 키르케는 남성을 유혹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을 썼다. 바로 자신의 성적매력을 이용하여 그를 무릎꿇게 한 것이다. 이 육체의 마법은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요, 애처가인 오디세우스마저도 단숨에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킬만큼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마치 진공 청소기 같은 흡인력으로 남성의 정액 한 방울 까지도 빨아들인 키르케의 성적 마력 때문에 지금도 서양에서는 남자가 여인의 육체에 넋을 뺏길 때 '키르케에게 홀렸다'는 비유를 한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두 점의 키르케는 마녀의 관능미가 얼마나 농염한가를 잘 보여 준다.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

 

 

그중 <질투하는 키르케>는 질투심으로 독기를 품은 여인의 잔인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키르케에게 이토록 강렬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남자는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다. 글라우코스는 아름다운 처녀 스킬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이 났다. 짝사랑에 애가 탄 글라우코스가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키르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자,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사랑의 화살이 키르케에게 꽂혔다. 당황한 글라우코스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은 오직 스킬라뿐임을 못박고 키르케의 구애를 냉정하게 거절했다.

 

질투심에 파랗게 질린 키르케는 스킬라가 평소 목욕을 즐기는 연못에 마법의 약을 풀어 그녀를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이 장면은 연못에 마법의 약을 붓는 살벌한 키르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연적의 미모를 망치기 위해 눈에 가득 독기를 품고 이를 악무는 키르케의 표정에서 오싹한 한기보다는 에로티시즘의 극치가 느껴진다.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키르케>

 

키르케의 냉혹한 아름다움은 <오디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키르케>에서 더욱 절정에 달한다.알몸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요염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마법의 술잔을 내밀며 유혹을 한다. 왼손에 높이쳐든 막대기는 마술 지팡이다. 마법의 술에 취한 남자를 이 막대기로 치면 금새 흉측한 돼지로 변해 버린다. 키르케의 발치에 몽롱한 눈을 치뜬 채 널브러져 있는 돼지도 마법에 걸린 희생물이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얼뜬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키르케의 등뒤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 어렴풋이 비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라는 명성은 간 곳 없고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키르케의 눈부신 자태는 화면을 압도할 만큼 크고 당당한 반면 영웅의 모습은 초라하고 왜소하게 그린 것도 그녀의 유혹이 그만큼 치명적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키르케는 신비한 매력을 남성의 몸과 마음을 뺏어 파멸시키는 요부의 전형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남자를 사로잡는 여성의 강력한 힘은 마법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마법에 걸리지 않고서야 그토록 멀쩡하던 남자가 제 정신을 잃고 집안과 명예,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욕정에 빠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명옥 <팜므파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