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감성 - 통하는문

죽음을 부르는 사랑의 거짓말 <사포와 파옹>

다연바람숲 2006. 1. 14. 17:45

Oil on canvas. 225.3x262 cm
France, 1809, Yusupov Palace Museum, Leningrad>

 

위 그림은 사랑에서 진실이 떠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욕망으로 거짓을 꾸미다가 결국 종말에 이른 연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거의 환각에 까져 기절 상태에 있는 여인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사포(sappho)이다. 음악을 연주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음을 무릎에 떨어진 종이가 말해 주고 있다. 슬프게 미소 지으며 죽어가는 그녀의 고운 얼굴은 필경 말 못 할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사연이란 이러하다.

 

사랑의 시를 짓고 있던 사포는 어느 날 신전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칠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아프로디테를 찾아온 파옹이란 늙고 추한 이방인 청년이 사포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너무나 황홀한 사포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파옹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신전에 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아프로디테에게 마법을 청하게 된다.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향을 부탁한 것이다. 며칠 후 신전으로 찾아온 사포를 본 파옹은 그 향을 신전 한구석에 몰래 피워둔다. 그리고 향로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향기에 취해 무의식중에 마법에 걸려든 사포는 파옹이 지닌 본래의 추한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오랫동안 꿈꿔 온 이상적인 배우자로 생각한다. 그때를 틈타 파옹이 사포에게 다가가자 환각에 취한 사포는 그에게 얼굴을 기대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미 비극적은 결말이 예고되고 있었다.

 

한창 사랑을 고백하던 중 향로의 연기가 사라져 사포는 결국 파옹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그만 충격으로 실신해 버렸다. 사포는 나중에 정신을 차렸지만 이상하게 파옹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절망한 나머지 그녀는 사랑을 노래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거짓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포는 기원전 6세기경 실재했던 그리스의 시인이다. 시인의 상징인 면류관과 악기를 19세기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토록 당당했던 사포마저도 여인에 불과했다. 파옹에게 머리를 기댄 모습에서 연약한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 여인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약해진 모습은 아름다워 보인다. 파옹은 젊고 잘생긴 모습으로 변했지만 어딘가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과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며, 그의 자세는 비굴함마저 느끼게 한다. 파옹의 뒤로 향이 피어오른다. 두 연인의 배경에는 침대가 그려져 있는데 마치 곧 침대로 가서 사랑을 나누기 직전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에로스가 사포의 악기 루트를 들고 있다. 멀리 베란다에 비둘기 두 마리가 다정하게 애무하고 그 뒤로는 두 그루의 나무가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다. 최면에 빠져 사포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임을 할 수 있다.

 

다비드의 그림은 부드러운 분위기가 지나쳐 바라보는 사람마저 최면 상태에 빠져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포의 표정은 바라보기만 해도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정신을 차려보면 파옹의 화살과 창이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사포와 대조를 이뤄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침대 한쪽으로 보이는 노래하는 뮤즈들의 황금 부조와 사포의 춤추는 듯한 자세는 사랑이 가져오는 도취와 환각적 효과를 돕는다. 사랑은 다비드의 그림처럼 환각 속에서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과 시에 맞춰 춤추다가 결국 슬프게 죽어가는 것일까? 사랑 이야기에는 거의 언제나 거짓과 배신이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연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속이고 그 거짓에서 배신감을 느끼며 이별을 맞이한다. 때로는 사포의 자살처럼 이별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사포와 파옹의 비유는 결국 진실에 대한 풍자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진실의 왜곡된 관계를 보여주는 이 그림에서 다비드는 우리 모두가 빠져들고 있는 잘못된 사랑의 허점을 꼬집고 있다. 사랑의 한구석에는 분명히 치명적인 거짓이 들어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달콤한 최면에 취해 독이 서린 거짓을 들이마시게 된다.

 

 

박정욱의 <그림속 연인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