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다연바람숲 2019. 2. 1. 13:58





-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인간의 마음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욕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허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색(色)과 욕(慾), 이렇게 두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보아도 부족한 그 무엇. 저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닌 묘한 괴담 비슷한 것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를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



막내 딸아이가 엄마와 꼭 함께 가고싶었다던 서점,

그 서점의 한쪽에 마련된 인간실격의 코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같은 작가와 같은 제목의. . . 출판사와 번역자와 책표지가 각각인 인간실격이 눈에 띄었던 건,

아마도 같은 이름 다른 옷을 입은 책들이 멋스럽게 꾸며진 그 특별한 공간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도, 인간 실격이라는 책 제목조차도 낯설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책 뒷표지의 짧은 글이 주저없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라해도 무리가 아닐겁니다. 그렇게 다자이 오사무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많은 소설 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녹여 온 작가가 가장 밀도있게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는 인간 실격의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소설 속 요조라는 인물에 청춘의 다자이 오사무를 오버랩하며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소설을 읽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얼굴은 몰라도 책표지를 장식한 에곤 쉴레의 자화상에 얹어 책의 서문에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한 사진 속의 남자를 유추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실제 작가와 전혀 다르고 엉뚱한 모습일지라도 어차피 소설이외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출판사는 소설 인간 실격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인간 실격>은 <백치>의 오다 사쿠노스케,<타락론>의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무뢰파, 혹은 신희작파를 대표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후기 걸작이다.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여린 젊은이가 타인의 위선과 잔인함으로 파멸되는 과정을 그렸다. <인간 실격>은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스스럼없이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준다.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이 작품만큼 명확하게 표현한 작품도 드물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내맡기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 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이다.


유리 멘탈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상처받기 쉬운 영혼, 작은 충격에도 깨져버리고마는 영혼.

거짓 웃음과 희화적인 연극을 하면서까지 사회와 사람들과 융화하고자 애쓰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상처받는 영혼,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가득한' 인간의 삶에 스며들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해가는 영혼, 치열한 삶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어가는 영혼. . . . 소설 속에는 약해서, 너무 여리고 약한 멘탈때문에 인간 실격이라는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젊은이의 암울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하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 실격자라고 지탄을 해도 스스로 자신을 인간 실격자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정말 개차반 같은 인생을 살아도, 인간 이하의 잔인함과 악행을 일삼아도 뻔뻔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세상에서 스스로 인간 실격자라 자인하며 파멸해 가는 소설 속 주인공 요조의 모습은 오히려 손을 뻗어 구원해주고 싶을만큼 아프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소설과 같은 삶을 살다가 다섯 번째 자살 시도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 실격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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