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추운 날의 산책

다연바람숲 2017. 12. 18. 17:37

 

 

 

 

 

 

 

얼음의 각주 / 신용목

 

 

 

문득, 먼 하늘에 박혀 있는 방패연이 보일 때가 있다

미끄러져

 

넘어져서,

언 호수에 박혀 있는 낙엽이 보일 때— 물고기 가면을 생각했다 그걸 쓰고

안부를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디를 지나고 있나요?

 

아직 어떤 우연도 철거되지 않았다

하필 지금 여기에 겨울이 있는 것,

 

둥글게 도린 얼음의 눈동자로 서로를 쳐다볼 때

물의 가면을 쓰고 있거나, 하나의 얼굴로 겹쳐진— 그것은 물의 관상일까? 물에 비친 관상일까?

 

온전한 과녁이 되기 위하여 호수는 파문을 가두었다, 태양의 빠져버린 눈동자

안부는 늙어가는 한 우연에게,

운명을 점치는 나쁜 버릇에게

 

바람이 원심으로 몸을 휘감을 때

문득, 먼 하늘에 박혀 있는 방패연이 사라진다— 꽝꽝 얼어서도 멈출 수 없는 얼굴

 

이곳에 다다르려면 넘어져야 한다, 물고기의 자세로

 

이곳을 벗어나려면 뒤집혀야 한다, 물고기의 눈으로

미끄러져

 

넘어져서

문득, 먼 하늘에 박혀 있는 작살이 보일 때가 있다

 

 

*

 

넘어져야 보이는 세상이 있다.

뒤집혀봐야 보이는 세상도 있다.

미끄러져서, 넘어져서 다시 보라고

호수는 파문을 가두었다. 그 각주를 읽는다.

 

늘 늦은 밤에만 보던 호수를 모처럼 밝은 날에 볼 때,

어둠에 가려 보이지않던 풍경들이 민낯의 얼굴을 내민다.

저토록 투명한 세상이 자신의 말을 가둘 때 나는 소리도 들릴 듯 하다.

걸음과 걸음 사이로 부는 겨울바람은 감정과 감정의 행을 가르는 마침표 같다.

 

모든 것이 선명하다.

미처 마음을 가두지 못한 호수의 경계, 물과 얼음의 경계도 선명하다.

가둔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미처 가두지 못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호수를 떠돌던 질문들이 화살처럼 나를 향할 때 나는 또 과녁이 된다.

 

돌아가지 않는 시간이 있고

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있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있다.

 

그 어떤 시간도 다시 오지않지만

언 호수의 쨍쨍한 물빛들은 시간들을 반사한다.

 

추운 날의 산책은 사색이다.

호수도, 바람도, 언 호수에 박힌 낙엽도,

경계가 선명할수록 내게 더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