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단상 - 바람엽서

그냥 그저그런 농담

다연바람숲 2017. 8. 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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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길고 긴 폭우와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화분을 죽었구나 뒤란으로 옮겨 놓았더니

그나마 살았던 줄기들이 새 초록 줄기를 뻗고 그 줄기서 또 꽃을 피운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 눈 밖으로 외면하고 버려둔 것이 살아 꽃을 피운다.

 

살아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한 화분에서 나란히 공존하고 있으나

하나의 줄기가 살고 한 송이의 꽃을 피워도 엄연히 살아있는 것이니

살아서 견뎌서 이겨서 새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대로 장엄이다.

꽃이라는 허상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생명의 이름으로 태어난 그 모습 그대로가 지극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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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제주도로 떠난 서울의 친구가 모처럼 추자도에 낚시하러 갔다가 물고기 대신 노루를 잡아왔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추자도에도 노루가 있어 사냥을 하는구나, 물고기 대신 노루라도 잡았으니 빈 손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하였다가 한참을 민망하였다.

배 타고 나가 낚시를 하려다가 태풍 노루때문에 무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정말 노루를 잡았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

 

부산서 함께 여고를 다닌 동창 중에 나처럼 충청도로 시집와 유일하게 청주에 함께 살고 있는 여고친구가

SNS에 친구야 잘 지내지? . . 지나면서 뻬꼼 들여다 봄~ 댓글을 남겨놓은 걸 보고 바로 전화를 했다.

지나는 길이면 얼굴 보여주고 가지 그냥 가면 우야노 했는데. . . 그 친구 깔깔 웃으면서 말하길,

글로. . SNS 상을 지나며 빼꼼이었댄다. 니는 예능을 다큐로 받나? 그 말에 나도 뻥 웃음이 터졌다. 

 

고지식도 이만하면 병인가.

친구 말처럼 예능을 다큐로 받는 쓸데없는 진지함이라니,

이해력이 부족한 것인가. 융통성이 없는 것인가, 고지식한 것인가,

또 과하고 세상 진지하게 다큐에 다큐로 생각을 더하다가 다시 뻥!

이만하면 피곤해도 너무 피곤한 사고를 하고 있는 셈.

 

책을 읽다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작가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가, 사물과 정황의 의미를 해독하고 파악하려고 집중하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

때로 진실은 조금은 가볍게 무심한 듯 한 발 물러서서 천천히 바라볼 때 그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진지한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무거워버리면 피곤한 인생이 되기 쉽상이다.

그러니 딱히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진지해서는 재미없는 일, 예능은 예능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예술 작품 중 호불호가 가장 엇갈리는 쟝르가 아마 영화가 아닐까 싶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 <너의 이름을> 을 평한 글들을 읽다가 여성 혐오, 혹은 페미니즘까지 흘러가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물론 예술 작품에 대한 느낌이나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너무 지나친 해석은 내가 예능을 다큐로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타인에게 느꼈던 불편한 모습들이 결국 나의 모습일 수도 있었던 셈.

 

바람이 불어온다.

멈추어 있지 않다는 것,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나는 종종 내 자신에게 말을 건다

 

"가볍게 살자

가볍게..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말야"

그러면 또 다른 내가 대답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될 때가 오겠지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싶지 않은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