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다연바람숲 2017. 7. 15. 15:35

 

 

 

 

 

 

흐린 날은 /  장옥관

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 허기 때문에
놓쳤던 안경알의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그 행복했던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 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

 

*

 

막다른 길 같은데

모롱이를 돌아가면 그림같은 집 몇 채와

끝없이 펼쳐진 도라지밭과 알록달록 꽃밭들이 나타납니다.

 

어느 집은 미술관을 닮았고

어느 집은 동화 속의 집 같고

어느 집은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너와집을 닮았습니다.

 

모두 담장이 없거나

텃밭과 꽃밭을 마당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굳이 문을 두드려보지 않아도

마당 한 켠 정갈한 채소밭과 이 계절에도 빛을 달리하는 환한 꽃밭을 보면

그 집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인상과 모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흐린 날의 풍경은 조금 더 선명합니다.

너무 밝아 보이지않던 먼 곳의 풍경도 조금 더 가깝습니다.

 

사람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마냥 좋고 행복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흐린 날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너무 밝아 보이지않던 시간의 얼룩들,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람의 뒷모습,

미처 내가 흘려내지 못한 눈물까지도 보입니다.

 

흐린 날,

혼자 오래 길을 걷다보면

내가 부재한 내가 있었음을, 그 얼굴을 만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