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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고통과 위험이 낳은 로맨스 스토리…금비 내리는 감옥서 다나에는 사랑했네

다연바람숲 2017. 5. 20. 12:56

 

                          ㅁ그림❶ ‘다나에’, 베첼리오 티치아노, 캔버스에 유채, 119×165㎝, 1545~1546년. 서양미술사에서는 황금비로 다나에를

                          유혹하는 제우스를 그린 그림이 무수히 등장한다. 화가들은 앞다퉈 다나에 신화를 재해석했다. 그림❷ ‘다나에’, 구스타프

                          클림트, 캔버스에 유채, 77×83㎝, 1907~1908년. 대부분의 화가들은 높은 탑에 갇혀 비너스의 자세로 발가벗고 누워 있는

                          다나에를 그렸다. 반면 클림트의 다나에는 마치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 젖히고 잠을 자는 듯한 포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기가 더 쉽다. 전쟁 중에 얼마나 전설적인 로맨스가 많았던가? 오죽했으면 전후 베이비붐 세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랑은 이국적인 배경에서 더욱 잘 자란다. 색다른 분위기, 여행지, 낯선 곳, 또는 두려움 때문에 감각들이 고조될 때 사람은 신비주의자가 되고 엑스터시를 느끼며 사랑이라는 야릇한 감정에 휘말린다. 고통과 위험이 닥쳤을 때 로맨스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왜일까. 위험이 일종의 ‘최음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Danae)는 감방에 갇히는 위기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에로틱한 사건을 연출하게 된 기막힌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Akrisios)는 아가니페와 결혼해 딸 다나에를 낳았다. 다나에를 낳은 뒤 아가니페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신탁을 구해 보니 ‘아크리시오스에게는 아들이 없을 것이고 딸 다나에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아크리시오스는 그 아이에게 죽을 운명’이라는 게 아닌가. 겁에 질린 아크리시오스는 너무도 사랑하는 딸인 다나에를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높은 탑에 위치한 청동 감옥에 가뒀다.

젊은 나이에 빛도 들지 않는 감방에 갇히는 참으로 불운한 신세가 된 다나에! 그렇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한 가지 행운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빼어난 미모였다. 청동 감옥 밖에서도 다나에의 미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제우스는 이 귀중한 정보를 흘려듣지 않았다. 제우스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에 침투하기 위해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제우스가 누구던가. 완전 창조적인 발상과 변신의 귀재가 아니던가. 그는 마음먹으면 못하는 게 없었다. 특히 그 일이 아름다운 여자와 관련됐을 때의 변신 능력은 가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신해 청동 감옥의 틈을 파고들었고, 무사히 감옥에 침투한 뒤 그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품었다. 황금빛 빗줄기처럼 판타스틱한 분위기를 누가 마다할 수 있었겠나.

이들 사랑의 결실로 페르세우스(Perseus)가 탄생한다. 메두사의 목을 자른 그 유명한 영웅이다. 딸이 아들을 낳자 아크리시오스는 딸과 손자를 나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리도록 명령한다.

그렇게 해 세리포스 섬에 다다른 모자는 어부 딕티스에게 구출되는데 그는 섬의 왕 폴리덱테스의 친형제였다. 왕은 아름다운 다나에에게 욕정을 품었으나 페르세우스 때문에 감히 다나에를 범할 수 없었다. 왕은 페르세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강요했다.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사람은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우스에겐 왕의 아들답게 특혜가 주어졌다.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도움으로 메두사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메두사를 처치한 페르세우스는 고국에 돌아와 본의 아니게 외할아버지 아크리시오스를 죽이게 된다. 결국 예언이 정확히 실현되고,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서양미술사에는 황금비로 다나에를 유혹하는 제우스를 그린 그림이 무수히 등장한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티치아노, 바로크 시대의 렘브란트,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와 그의 딸 아르테미지아 등 수많은 화가들은 앞다퉈 이 신화를 재해석해냈다. 그리스 신화의 이 소재가 특별히 예술가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은유기 때문일까?

수많은 다나에 그림 중 특별히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으니, 바로 클림트의 것이다. 클림트는 이전 선배 화가들의 다나에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화가는 높디높은 탑에 갇혀 비너스의 자세로 발가벗고 누워 있는 다나에를 그렸다. 통상 옆에는 날개 달린 천사, 즉 큐피트(에로스)를 함께 그린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딱 비너스와 큐피트로 착각하기 쉽다. 정작 다나에가 황금비를 직접 받아들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별로 없다. 시녀가 받거나, 큐피트와 함께 받거나, 아니면 창가 쪽에서 빛이 들어오면서 황금비가 내리는 정도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구도와 형태, 분위기를 지녔다. 일단 여성의 몸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치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 젖히고 잠을 자는 듯한 포즈다. 당시로서도 이런 구도의 조형법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다나에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고 황홀경에 빠져 있다. 오른손은 길고 뭉툭한 무언가를 쥐려 하는 듯하고, 왼손은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으로 사라졌다. 클림트는 어찌하여 마치 귀접몽(꿈속에서 귀신과 성교하는 것)처럼 나른하고 몽환적인 상태의 다나에를 그렸을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클림트가 55세의 나이에 독감의 후유증인 뇌졸중으로 죽자 14건의 유자녀 양육비 청구소송이 벌어졌다. 대부분은 클림트와 관계가 있던 모델의 아이였는데, 그만큼 클림트는 모델과 각별히 정을 통하면서 지냈다. 모델 가족의 장례 비용을 대주는가 하면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했을 만큼. 모델들은 클림트를 아주 좋아했고, 언제나 그의 요구에 따라 관능적이다 못해 외설적인 포즈까지 취해줬다. 클림트 작업실에는 항상 벌거벗은 여러 모델이 상주해 있었고, 마치 누드 서커스장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진다.

다나에는 클림트가 사랑했던 여러 여성이 혼재해 있는 모습이다. 빨간 머리를 특별히 좋아했던 클림트답게 빨간 머리를 지닌 모델 미치 짐머만(클림트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던)의 모습도 있다. 상류층 고객이자 한때 깊은 사랑을 나눴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사고로 장애를 입은 오른손까지 그렸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형상은 다나에의 허벅지와 그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비다. 비유컨대 황금비는 씨앗, 즉 왕의 정액이고, 튼실하고 굵은 허벅지는 그 씨앗이 뿌려지는 자양분이 풍부한 대지다. 그녀의 허벅지는 관능의 메타포요 다산의 상징이다. 잉태를 위한 생명력의 이미지를 허벅지와 황금비가 암시한다고나 할까. 마치 마리아의 수태처럼 황금빛 빗줄기는 신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단순한 도발이나 관능을 넘어선 생명력의 잉태에 관한 이미지로 거듭난다. 더군다나 ‘황금비’라는 모티프가 금은세공사 출신 가문에서 태어나 아르누보, 아르데코 문양과 색채를 사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의 주창자였던 클림트에게는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의학에서는 이 신화에 근간해 ‘다나에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강간 사건을 다루다 보면, 단 한 번의 성교로 임신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상적인 배란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급작스럽게 배란이 일어나 임신이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동물은 배란 형태가 각기 다르다. 야생토끼나 낙타 같은 동물은 수컷이 있어야만, 즉 수컷이 교미 동작을 취해야만 배란이 되고 평소에는 배란이 되지 않는다. 원숭이는 위협과 공포를 느껴야 비로소 배란이 된다. 그래서 수컷 원숭이는 교미 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암컷이 안고 있는 새끼를 빼앗아 던지고 때려 새끼 원숭이가 소리를 지르게 하는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때 암컷 원숭이가 배란이 되면서 발정해 교미가 가능해진다. 이런 ‘공포배란 현상’이 인간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바로 ‘다나에 신드롬’이다.

이처럼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까지 덧붙여져, 다나에 스토리는 한층 더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로 올라섰다. 당연히 화가들이 열광하며 달려들 수밖에.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유경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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