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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의혹과 의심을 견뎌낸 사랑…천상의 미녀(프시케)와 미소년(에로스)의 러브스토리

다연바람숲 2017. 4. 11. 12:54

 

(위)‘큐피드와 프시케’, 1817년, 자크 루이 다비드. (아래) ‘에로스와 프시케’, 1817년,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남자들은 오늘도 아내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의혹에 찬 눈초리에 지친다. 여자들은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직감이 귀신같은지, 숨기고 싶고 눙치고 싶어 하는 남편의 속내를 잘도 간파해낸다. 역사 이래로 소외되고 배제된 삶을 살아온 타자들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생존하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 같은 것일까?! 어쨌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태세라면, 아내의 잔소리와 불평불만을 좀 더 창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스신화에 어렵게 결실을 맺은 사랑의 메타포로 자주 인용되는 스토리가 있다. 가장 지고지순한 동시에 가장 고난과 역경이 많았던 사랑, 바로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이다.

비너스의 아들 에로스(큐피드)가 평생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자가 프시케다. 그러니 프시케는 어떤 여자였겠는가? 그녀는 새벽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 태어났다. 그만큼 순수하고, 수려하고, 숭고하고, 천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남성의 숭배 대상이 됐지만, 청혼하는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대충 예쁜 두 언니는 이웃 나라 왕자한테 시집가 잘 살았다. 이런 사실은 프시케를 뼛속까지 외롭게 만들었다. 요즘 남성들이 지나치게 우아하고 정숙하며 가방끈 긴 여자보다는 적당히 예쁘고 귀엽고 명랑하고 쾌활한 여성들에게 더 호감을 갖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까.

프시케의 아버지는 고매한 딸에게 아무도 청혼하지 않자 신탁을 받으러 간다. 우연히 아프로디테 신전에 들른 아버지는 때마침 자기 딸 때문에 화가 난 아프로디테와 대면해야 했다. 아프로디테는 뭇 남성들이 프시케를 새로운 여신으로 칭송하느라 자신의 신전에 더 이상 경배하지 않는 것에 질투와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아프로디테는 “프시케가 죽음과 결혼해야 한다”는 잔인한 신탁을 내린다. 산 정상 바위에 묶어두면 죽음이 다가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에 따르면 모든 신부는 결혼식 날 죽게 된다고 한다. 결혼이 바로 장례라는 것인데, 결혼과 동시에 내면의 처녀가 죽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다.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 에로스에게 프시케가 죽음과 사랑에 빠지도록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에로스는 프시케를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그만 실수를 저지른다. 자신의 화살에 손가락을 베어 다름 아닌 자신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자리에서 프시케를 아내로 맞을 결심을 한 에로스는 친구인 서풍 제피로스로 하여금 프시케를 산꼭대기 낙원에 내려놓게 한다. 최악의 상황을 기다리고 있던 프시케는 천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에로스와 프시케는 매일 밤에만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에는 늘 금기가 있는 법.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봐서도 안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어딜 가든지 절대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알면 다친다고 덧붙이면서.

현실의 남성 또한 아내가 자기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동의하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다. 결혼생활에 대한 남성의 태도는,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 할 집이 필요하나 그 집이 골칫거리는 아니어야 한다는 식이다. 남성은 일에 몰두할 때 집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남편은 그저 자신이 마련해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부인이 낙원처럼 지켜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모든 낙원은 의심스러운 장소다. 금세 무료하고 지루해진 프시케는 남편에 대해 함구하는 대신 시집간 언니들을 초대해 달라고 한다. 마치 여성들이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좋은 차를 타고 쇼핑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듣는 대가로 남편의 일에 덜 개입하는 것처럼.

죽은 줄만 알았던 프시케의 상황은 언니들의 이성을 잃게 했다. 질투심이 폭발한 언니들은 에로스가 흉측한 괴물이며, 아기가 태어나면 프시케와 아기를 잡아먹을 거라고 모함한다. 그러곤 등불과 날카로운 칼을 준비해 에로스를 죽이라고 조언한다. 프시케는 음모에 넘어가 모든 것을 준비한다. 에로스가 잠들자, 프시케는 등불을 켜 남편의 얼굴을 본다. 아뿔싸!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년이 거기 있는 게 아닌가. 놀랍고 당황하고 죄책감에 빠진 프시케는 빼어 든 칼을 떨어뜨린다. 이때 실수로 에로스의 화살을 건드리고 그만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 그 순간 거스를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 이는 그녀 자신이다. 게다가 급히 등불을 치우다 기름 한 방울이 에로스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진다. 통증에 잠을 깬 에로스는 크게 실망해 날아가려 하고, 프시케는 절박하게 매달려보지만 헛수고였다.

에로스는 프시케가 인간 아이를 낳을 것이고 자기와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이때부터 프시케의 ‘사랑 되찾기’ 여정이 시작된다. 사랑을 찾기 위해 지옥까지 다녀오는 등 파란만장 우여곡절 끝에 제우스의 도움으로 에로스와 결혼하고, 결국 불사의 몸을 얻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화가들이 가장 매료됐던 테마는 에로스가 새벽이 오기 전 프시케를 떠나는 장면과, 프시케가 칼과 등불을 갖고 잠자는 에로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특히 에로스의 얼굴을 보며 경악하는 프시케의 모습은 바로크풍으로 자주 그려졌다. 아무래도 밤에 일어난 일이니,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 스포트라이트, 즉 강렬한 명암법(키아로스쿠로)을 구사하는 데 아주 적합했을 터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그림은 꽤 주목할 만하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금기를 깬 인간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회한의 감정을 이처럼 복잡하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작품은 없을 정도다.

칼 융에 따르면, 프시케의 언니들은 여성 내면에 있는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존재다. 이런 의혹과 의심의 목소리를 ‘그림자’라고 부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무의식 원형의 하나로서 그림자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어둡고, 열등하고, 유치한 측면을 말한다. 융은 삶의 진화가 이런 ‘그림자’를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프시케처럼 내면의 의혹과 불평불만이라는 그림자로 인해 발생한 사건은 결국 인간의 의식을 진화하게 만든다는 것. 그러니 인생에서 일어나는 네거티브한 일들은 분명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소중한 스승일 것이다.

융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신화는 남녀 사이의 지혜로운 소통 방식을 제공한다. 프시케가 두 언니로부터 등불과 칼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빛과 칼은 매우 상징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여성은 등불은 사용하되, 칼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혹 칼을 사용하려면 명쾌한 식별이나 애매한 것을 잘라낼 때만 사용해야 한다. 여성이 쏟아붓는 말도 칼에 해당한다. 칼은 냉소적일 뿐 아니라 단절을 가져온다. 그런 의미에서 칼은 내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등불은 무엇인가. 여성은 자신의 의식의 등불로 남성의 가치를 드러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남성의 내면에 살고 있는 신적인 부분을 살려내는 순간, 남성의 의식이 확장된다. 이때 남성은 전율한다.

이 신화는 여전히 남성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데 여성의 인정만큼 소중한 조건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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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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