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제일 큰 병은 애정결핍증이다. 모든 애정결핍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은 모성애의 부족이다.
모성결핍은 세상에 드러난 범죄와 정신질환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외상에는 일찍 죽은 어머니, 가출한 어머니, 부모의 불화와 이혼 등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와의 결별이 관련돼 있다.
어쩌면 이런 모성결핍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깊은 슬픔과 우울증의 근원이리라.
어머니의 부재를 경험한 예술가들은 모성결핍을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했을까?
성안나와 성모자’, 목판에 유채, 1508~1512년, 루브르미술관,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빈치는 미운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 처녀 생식을 하는 모성신 ‘무트’를 그림에 적극 표현했다
서양미술사의 오랜 테마 중 하나가 ‘성모자상’이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가면 성모자상이 넘쳐난다. 너무 흔해 아무 생각 없이 건성건성 지나칠 때가 많다. 모자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이 도상이 더 이상 눈길을 끌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성스러운 모자관계,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레토릭이 일종의 클리셰(Cliche·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전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테마를 화가와 화가 어머니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그림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온다. 100% 남자들 작품이니, 남성들의 모성애에 대한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말씀. 게다가 성모마리아라니,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야 마땅한 희생적이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갖고 싶다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로망을 반영한다. ‘무염시태(성모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원죄에 물듦 없이 잉태됨)’의 성모마리아! 영락없이, 남성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영원한 모성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아버지 없이 홀로인 엄마, 영원히 처녀인 엄마의 이미지를 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남성의 집단무의식을 표현한 미술사의 걸작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안나와 성모자’다.
다빈치는 공증인과 시골 소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유년 시절을 친모, 외조부모와 함께 보내던 그는 어머니가 결혼할 무렵인 네 살쯤 친부에게 돌아간다. 레오나르도는 어린 나이에 계부와 계모를 동시에 경험한 셈이다. 이후 계모가 4번 바뀌었지만 그들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그래서인지 다빈치는 이 작품에서 계모와 친모를 결합시켰다. 할머니인 성안나는 친모, 마리아는 계모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리아의 치맛자락에 독수리 형상을 그려 넣었다는 것. 다빈치는 이집트의 모성신으로 독수리 형태를 한 무트(Mut·독일어로 Mutter, 즉 mother)라는 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그림에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무트신은 수컷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람’에 의해 수태를 하며 대개 그 자신이 남성 성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처녀 생식을 하는 모성신에 대한 환상을 꾸며냈다. 이런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그를 버렸던(나중에는 받아들였지만) 미운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성모자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애로운 어머니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겐 엄마가 두렵고 불안한 존재고, 묘연하게도 파악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여자며, 자식을 돌보지 않고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식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조반니 벨리니는 성모자상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왜 그렇게 성모자상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의 성모자상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날카로운 감수성, 딱딱한 형태감과는 달리 베네치아 화파만이 가진 빛에 대한 부드럽고 섬세한 색채감각이 돋보인다. 마돈나는 더욱 유려하고 아름다워진 느낌인데, 그게 다가 아니다. 어딘지 베일에 가려진 듯 훨씬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다.
벨리니 전기를 보면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으며 어머니 유언에도 벨리니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벨리니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닌 계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벨리니가 그린 성모자상에는 아기 중심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주이상스(Jouissance·열락)를 즐기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 그림 속 예수는 처연한 표정으로 자기에게 관심 없는 마리아에게 간청한다. 자기를 좀 봐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울먹거린다.
'마돈나’, 캔버스에 유채, 1894~1895년, 뭉크.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뭉크는 여성들이 자기를 두고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여성 혐오가 생겼고 이는 섬뜩한 마돈나 그림으로 이어졌다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폐병으로 잃고 열네 살에는 엄마 역할을 해주던 열여섯 살의 누이도 같은 폐결핵으로 잃는다. 그리고 연이어 여동생의 정신질환, 아버지의 자살과 남동생의 죽음 등을 경험한다. 뭉크 전작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처절히 서려 있는 이유다. 이런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성 혐오로 이어진다. 자기가 사랑하는 두 여자, 즉 엄마와 누이가 자기를 두고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 아이에겐 버림받은 트라우마적 사건으로 각인된다. 그래서 모든 여자는 나를 버릴 것이라는 무의식적 사고가 뿌리내리고, 여자를 사랑하지만 여성에게 빨리 싫증을 내며 여성을 혐오하게 된 것. 사랑의 반작용이다. 게다가 실제 보헤미안적 자유부인이었던 첫사랑은 뭉크에게 뼈아픈 상처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마돈나 3부작’은 다그니 유을이라는 어릴 적 고향 후배를 모티프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녀는 심각할 정도로 여성 혐오증에 시달린 뭉크의 편견을 깨끗하게 없애주는 유형의 여인이었다. 아름답고 교양과 지성미가 넘쳤으며 매혹적인 데다 예술적인 기질도 뛰어났다. 뭉크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예술가 모임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뭉크는 그런 그녀에게 사랑과 존경심을 동시에 품고 다가섰다. 지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지만, 뭉크의 사랑은 또 한 번 매몰차게 내동댕이쳐진다. 유을이 뭉크의 친구인 한 건축가와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데이트를 하다가 결국 뭉크의 친구와 결혼했던 것. 뭉크에게 다가온 두 번째 사랑 역시 지독한 상처와 환멸만을 안겨준 채 끝나고 만다.
‘마돈나 3부작’이 다그니 유을을 모델로 했어도 그림에는 뭉크의 곁을 스쳐간 어머니, 누이, 첫사랑 등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은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분명 성모마리아인데도 불구하고, 섬뜩하리만큼 서늘하고 무시무시하며 유혹적이다. 마돈나를 표현하면서 여성에 대한 무의식을 표출한 셈인데 이런 표현은 그의 상처와 절망을 얼마간 치유해줬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감정의 표출은 한 인간에게 최소한의 힐링 포인트가 되니까. 덕분에 평생 독신이었던 뭉크는 갖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았다. 전 생애 동안 자기 감정에 대단히 충실했던 까닭에 다작과 걸작을 동시에 생산한 보기 드문 화가로 남아 있게 된 셈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예술작품이란 예술가가 가진 근친상간, 동성애, 살인 충동, 파괴 욕망 등을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방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의 창작 행위는 일종의 자가 치료 행위다. 또한 그런 예술가들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고통, 고독, 상처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그림을,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다.
출처 - [ⓒ 매일경제 &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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