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할 줄 아는 종족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몸속에는 4만년 동안 지속돼온 강력한 질투의 유전자가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남자의 질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질투하는 당신, 무엇에 질투하는가? 라이벌의 재능에? 나보다 뛰어난 외모에? 더 인정받는 것에? 여자들에게 더 인기 있는 것에? 나보다 더 사랑받는 것에?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라틴어 ‘zélus’에서 유래했다. 열정과 따뜻함, 강한 욕망이라는 뜻이다.
ㅁ‘사랑의 그림자’, 프레데릭 샌디스, 1867년.
아우구스투스는 “질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질투는 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짝이 제3자와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표현되는 불편한 감정이다. 프랑스어로는 ‘jalousie’인데, 이는 창문에 거는 블라인드를 뜻한다. 몰래 블라인드를 살짝 걷고 연인을 주시하고 있는 질투의 화신이 연상된다. 특히 남자의 질투는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오로지 ‘보는’ 데서 생겨난다고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질투 역시 이미지에서 파생됐다. 알베르트의 팔이 로테의 허리를 껴안는 모습을 본 것에서 기인했다니.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구약성서 속의 카인과 아벨 등의 삼각관계는 모든 인간 갈등구조의 근간이다. 아이가 엄마의 연인인 아버지를 질투하고, 형제들이 부모의 편애에 질투하는 등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라이벌과 갈등구도 속에 놓인 실존적 존재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질투는 살아남기 위한 최상(?)의 메커니즘일지도 모른다.
“질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질투가 사랑의 증표라고 강조했던 아우구스투스. 그는 유년 시절 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 젖을 물고 있는 동생을 죽일 듯이 쏘아보면서 분노하던 자신의 모습을 얘기하곤 했다.
피카소 역시 유년 시절 여동생 올라가 태어나자 불같은 질투심을 보였다. 그는 어머니, 할머니, 네 명의 이모들, 여 사촌들, 그리고 누이 두 명 등 여성들에게 떠받들 듯이 키워진 탓에 성격이 모난 아이로 자랐다. 그런 그에게 여동생의 탄생은 ‘피카소 제국’에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유년 시절 여동생을 질투하던 피카소는 성인이 돼서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친구들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부추겼다. 마치 여자가 돼 남자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듯, 피카소는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하면서 은밀히 사랑 놀음을 즐겼다.
뭉크만큼 질투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가는 없다. 서양미술사에서 ‘질투’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도 뭉크의 것이 유일할 정도다. 어찌 보면 그는 지나치리만큼 졸렬하고 쩨쩨하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출시켰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검은새끼돼지’라 불리는 작은 술집에 자주 다니면서 두 작가와 가깝게 지냈다. 스웨덴 출신의 저명한 작가 스트린드베리와 폴란드 출신의 상징주의 시인 프지비셰프스키(스타추)였다. 스트린드베리는 여성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열정이 있었으나 이혼과 방황을 되풀이한 특이한 존재였고, 스타추는 신경학과 니체의 철학에 심취한 문학인으로 뭉크에 관한 최초의 평전을 쓰기도 한 작가였다.
노르웨이 출신인 이들 세 남자는 뭉크의 어린 시절 친구인 다그니 유을을 두고 사각관계를 벌였다. 뭉크를 ‘검은새끼돼지’로 데려온 것도 그녀였다. 스트린드베리와 스타추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뭉크를 포함한 세 사람이 경쟁하듯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 재기 발랄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스타추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뭉크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평정심을 잃는다.
ㅁ'질투 3’, 뭉크, 1913년. 뭉크는 사랑하던 여인을 친구에게 뺏기고 질투에 사로잡혀 질투 시리즈를 그렸다
‘질투 1’은 뭉크와 다그니, 스타추 세 사람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아담과 이브를 모티프로 한 것은 뭉크에게 불륜의 사랑은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 같은 죄의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욕정이 생겼고 질투, 불안, 죽음의 파멸이 시작됐던 것처럼. 그림 속 여자는 사과를 따려고 손을 뻗는데, 그녀의 빨간(원죄) 원피스가 흘러내리면서 알몸이 드러난다. 남자와 여자의 얼굴은 이미 유혹에 빠진 듯 붉게 물들었다. 오른쪽 전면에 드러난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다그니의 남편 스타추다. 창백하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그 모습이 질투에 몸서리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타추는 신비주의자로서 마법을 부리는 연금술사였다. 뭉크는 그가 모든 인간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악마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실 스타추는 열렬한 거짓말쟁이에 환각에 시달리는 알코올 중독자이자 재기 넘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당시 뭉크가 쓴 일기를 보면 스타추를 질투하는 한편, 그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의 아내가 된 여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픔과 친구를 속여야 하는 죄책감까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을 토로한 것이다.
“내내 나는 그녀의 남편이 눈치 채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만약 눈치를 챈다면 그는 처음에는 파랗게 질렸다가 나중에는 활화산처럼 분노를 폭발하겠지.”
‘질투 3’에도 스타추가 왼쪽 정면에 등장한다. 그는 얼굴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다. 뭉크는 스타추가 질투로 녹색이 되고, 그러고 나선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날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질투를 ‘초록 눈의 괴물’이라고 말한 것이 떠오를 정도다.
그러나 그림과 달리 질투의 당사자는 스타추가 아니라 뭉크 자신이다. 그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스타추는 뭉크와 다그니의 관계를 전혀 질투하지 않았다. 평상시 스타추는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으며, 아무도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고 주장해오던 터였다. 한번은 그의 아내가 어떤 러시아 왕자에게 자기 몸을 제공하길 바랐다. 스타추는 직접 그녀를 그녀의 새 남자친구에게 데려다줬다. 반면 뭉크와 스트린드베리는 질투로 격분했다.
아마도 뭉크는 질투하지 않는 스타추에게 열등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타추의 얼굴이 얼마나 담담하고 냉랭한지를 보라! 뭉크는 그런 식으로나마 자신의 질투심을 역설적으로 무마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멕시코의 국민화가이자 부부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는 여느 멜로드라마보다 치명적이다. 프리다는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 행각을 벌인 디에고와 이혼하지만, 1년 후 재결합한다. 프리다는 재결합의 조건으로 세 가지 협약을 맺는다. 첫 번째, 따로 사는 것. 두 번째, 성교 없는 결혼. 세 번째는 경제적 자립 등이다. 재결합 이후 프리다와 디에고 사이의 유대감은 더욱 깊어간다. 서로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폭도 넓어졌다. 이를테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애정 행각을 용인했다.
디에고는 드러내놓고 불륜을 저질렀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교제를 계속해서 비밀로 했다. 디에고의 격렬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디에고의 질투는 프리다가 디에고의 애정을 확인하는 유일한 심리적 기제였다. 그렇게 프리다와 디에고는 쓰라린 별거와 부드러운 화해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는 낯선 나! 그러나 질투는 잘 쓰면 약이 된다. 오히려 질투는 이미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에서 증발해버린 예기치 못했던 건강한 긴장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지금 무관심하게만 바라봤던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이는가?!
출처-[ⓒ 매일경제 &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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