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청주 다연, 4월 꽃밭에서 쓰는 편지

다연바람숲 2017. 4. 14. 18:12

 

 

 

 

 

 

 

 

 

꽃밭에서 쓴 편지 / 김상미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대가 떠난 뒤 나는 꽃들과 친해졌답니다. 그대가 좋아했던 꽃들. 그 꽃들과 사귀며 하루하루 새 꿈을 개발해내고 있답니다.

 

 

그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 안개꽃이었나요? 영원한 사랑. 그 꽃으로 그대는 나를 유혹하고 나를 버렸지요. 꽃밭 가득 그 꽃들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요. 깊이를 잴 수 없는 꽃들의 욕망은 그 자체가 울부짖는 색깔 같아 그대 없이도 나는 그 꽃들을 숨막히게 안고 숨막히게 그 향기를 맡아요.

 

 

이제 엉겅퀴처럼 싱싱한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나는 하루하루 화해의 개암나무 앞에 나를 문지르며 베고니아처럼 신중하게 아이비처럼 지조 있게 매일 밤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역경 속의 에너지를 키우고 있답니다.

 

 

그러니 늘 버림받아 우는 매발톱 꽃씨 따위는 이제 보내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진달래처럼 짧고 연약한 열정에 매달려 쐐기풀처럼 잔인하게 시들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옛사랑, 그대를 위해 행운목 한 그루는 보내드릴게요. 애석하게도 그대가 좋아했던 달맞이꽃은 모두 시들어 버렸어요. 깊은 밤에만 피는 노랗고 변덕스런 꽃. 봉선화처럼 성급하게 수국처럼 냉정하게 나를 떠난 그대처럼 그 꽃들은 모두 바람 부는 벌판에 내던져 버릴래요.

 

 

하지만 그대가 백석 시집 갈피에 넣어두었던 제비꽃은 내가 가질게요. 아주 오랫동안 보고 또 본 꽃이라 말이 통할 정도로 친해졌거든요. 버릴 수 없는 내 일부분이 되어 버렸거든요.

 

 

나는 이제 꽃들이 발산하는 생명력 없이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그립지가 않아요. 꽃잎 하나하나가 내게 상처를 주어도 그 상처 위에 오래 앉아 있으면 꽃잎 하나하나가 다시 나를 치료해 줘요.

 

 

그러니 잘 가요, 내 사랑. 내 사랑이 앞으로도 계속 제비꽃에 빠져 있을지, 패랭이꽃에 가 머물지, 아카시아꽃처럼 비밀스런 사랑을 탐할지, 아몬드 꽃처럼 무분별한 사랑에 빠질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나도 몰라요.

 

 

그렇지만 꽃들은 많은 걸 잊게 해주고 또한 많은 걸 떠올리게 해줘요. 두려움 없이 즐겁게 많은 걸 기다리게도 해줘요. 사랑하는 만큼 빠지게 하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보이고, 볼 수 있게 해줘요. 파닥파닥 상상력이 뒤쫓아 다니는 어린아이의 발자국처럼!

 

 

*

 

 

매일매일 꽃들이 보여주는 매력과 만나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잠시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꽃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옵니다.

어제는 보랏빛 아름다운 아네모네와 황금빛 러시아 양귀비를 선물 받았습니다.

다연의 주인장이 유난히 좋아하는 보랏빛을 올해도 친구가 아네모네로 선물해주었습니다.

 

지난 해 나쁜 사람의 몹쓸 손길로 한바탕 몸살을 앓던 페라고늄도 겨울을 잘 넘기고 꽃을 피웠습니다.

꺽이고 부러지고 뽑히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리가 허전하여 꽃분홍 한포트를 더해주었더니 한식구로 잘 어우러졌습니다.

선홍빛 페튜니아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벌써 소담한 꽃들은 여름을 지나는 동안 더욱 더 선명한 꽃들을 피우고지고 하겠지요.

파스텔톤으로 색색 채워놓은 리시안셔스는 올망졸망 꽃송이가 앙증맞고도 사랑스러워서 지나는 사람마다 발길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노랑과 분홍의 키 작은 마가렛은 지난 해 보랏빛 곱던 꽃의 빈 화분에 심었더니 그 꽃빛이 한낮의 등처럼 밝고 환합니다.

지난해 가을 다 되도록 잎이 나지않아 죽은 줄 알았던 남천은 겨우내 무럭무럭 잘 자라더니 씩씩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밑둥까지 싹뚝싹뚝 다 잘라서 뿌리만 남겨놓았던 트리안은 제일 먼저 봄잎을 틔우더니 제법 늘어질만큼 넝쿨을 뻗었습니다.

다연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해 온 무늬종 백화등은 바깥 공기를 쐬면서 더 윤기나게 새잎을 틔우는 중입니다. 곧 꽃이 피겠지요.

남천의 화분에는 더불어 사는 식구들이 많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불어나고 꽃을 피우는데 그 꽃빛이 신기할만큼 오묘합니다.

 

복잡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느라 봄이 봄인지 꽃구경조차 못했을 서울의 친구에게 내 뜰의 꽃사진들을 보내주었더니

참 정갈하고 이쁜 화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마음이 풍요로운 아름다운 정서가 부럽다는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작은 꽃들이 주는 풍요를 아는 사람은 작은 행복에도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꽃 피고지는 봄날입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꽃 피우지못하는 꽃이 지는 것만큼은 제 멋대로인 봄날입니다.

그럼에도 피는 모습만큼이나 지는 모습마저도 환장하고 울컥하게 아름다운 봄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