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1904~06년, 캔버스에 유채, 66.2*82.1cm, 브리지스톤 미술관, 도쿄
고독을 잊게 하는 붓 끝의 산
인간은 빵으로 살고, 재능으로 죽는 거라며 화를 낸 사람은 세잔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알겠습니다. 세잔의 아버지가 얼마나 완강하고 무서웠는지를. 자수성가형의 강한 아버지는 배고픈 화가가 되고자 하는 아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재능으로 죽어도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인정해주기에는 가족이 너무나 보수적이고 너무나 가깝지 않나요?
세잔이 가족의 환영을 받지도 못하면서 가슴 속에 묻어버리지도 못하고 꺼내 키워야 했던 그림의 불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년에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 선명해집니다. 저 그림은 세잔이 그린 생 빅투아르 산 그림들 중의 하나입니다. 산과 하늘과 숲과 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요? 움직이지 않는 산과 성이 움직이는 바람과 빛과 무성한 숲을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이 좋습니다. 성은 산을 향해 견고하고, 산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열려 있습니다. 무성한 나뭇잎들은 산과 성과 하늘의 살아있는 울타리 구실을 하며 모두가 하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렌지빛이어서 분명하게 시선이 가는 성은 무서울 정도로 조화로운 세상을 훔쳐본 인간의 의식 같습니다.
세잔은 말년 20년 동안 고향의 산, 생 빅투아르를 그렸습니다. 아이에게 산은 놀이터고 심신이 지친 도시인들에게 산은 휴식처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산을 그리고 또 그린 화가에게 산은 무엇이겠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젤과 캔버스를 메고 로브 언덕에 올라 생 빅투아르를 그린 세잔! 산의 마음이 되어 산을 그린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는 단순히 산을 경배한 것도 아니고 소일거리로 산을 그린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낳아주고 지켜준 산을 바라보며 자신이 산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엄마가 아이를 목욕시키듯 기꺼이 정화되는 기분으로 산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잔은 관찰의 힘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관찰은 단순히 보는 게 아닐 겁니다. 세잔이 말합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자연을 탐구해왔다. 본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그려야 한다." 잡생각을 지워가며 침묵 속에서 조용히 산을 바라보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집요하게 화가를 사로잡았던 원근법은 어쩌면 3차원 세계의 환영일 수 있다는 것을. 세잔은 원근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나서 바로 '색'의 혁명을 이룩합니다. 세잔은 인상파 화가면서도 순간적인 빛 너머의 존재에 집요했습니다. 모네의 그림이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 할 수 있다면 세잔은 빛 너머, 영광 너머 묵직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빛은 색으로 드러납니다. 캔버스 위에서 색은 존재를 알려주는 생명의 아이들입니다. 모네와 대조적인 그 점에서 그는 피카소나 마티스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빛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묘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날 강한 아버지로 인해 아들의 존재까지 감춰야 했던 세잔은 아주 소심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소심한 성격 탓에 나이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되었으니 그림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구원이었습니다. 그가 고독 속에서 20년이나 그려왔던 생 빅투아르 산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그의 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빛 너머 묵직하게 존재하는 어떤 견고한 구조를 보여주기에 산은 진짜 좋은 소재 아닌가요?
세잔이 말합니다. "생 빅투아르는 나를 이끌었다. 그 산은 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은 생 빅투아르의 의식이다." 세잔에게 생 빅투아르는 신이고 성전이며, 세잔은 생 빅투아르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릴케는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종교를 그렸다고.
프랑스 남부 엑상 프로방스에 가면 세잔의 길(Route de Cezanne)이 있습니다. 생 빅투아르를 그리기 위해 오른 로브 언덕까지의 길, 그 세잔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나'의 길은 무엇인지?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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