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백야행 / 히가시노 게이고

다연바람숲 2016. 10. 25. 16:07

 

 

지금의 너보다 훨씬 어릴 때였어. 정말 어린 아이였을 때. 하지만 어리다고 해서 악마가 덮치지 말란 법은 없잖아? 게다가 악마는 한 마리가 아니었어.

 

하루 중에는 태양이 떠 있을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잖아.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어. 물론 실제 태양처럼 일출과 일몰이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건 아니지. 사람에 따라서는 늘 태양이 비치는 사람도 있어. 내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사람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그땟껏 떠 있던 태양이 져 버리는 거야. 자신을 비추고 있던 빛이 사라지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지.

 

내 위에 태양 따위는 없었어. 언제나 밤이었지. 하지만 어둡지는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환하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충분했어. 난 그 빛 덕분에 밤을 낯이라 생각하며 살 수 있었고. 이해하겠어? 애당초 내게 태양같은 건 없었어. 그래서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는 두려움도 없었지.

 

그들은 자신들의 혼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그 결과 유키호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료지는 지금도 어두운 배기관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

 

가혹하다.

먹먹하다.

 

어른들의 추악함이 어린 영혼들을 빛도 없는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컴컴한 절망 속에서 한 아이는 빛이 되었고 한 아이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 19년,

어린 소녀와 소년은 망둥이와 새우처럼 서로에게 공생하며 청소년이 되었고 성인이 되었고 어른이 되었다.

 

자신들의 혼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 생존을 위해

그들도 결국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 추악한 어른이 되었다.

 

그들이 불행하였으므로 그들로 인해 누군가가 불행할 수도 있다는 자각 없이, 영혼 없이 어른이 되었다.

 

이런 사랑도 있다.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지켜주는 사랑,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사랑.

 

어른들이 지은 죄의 댓가가 그들이 견뎌야했던 백야라면,

그 사랑조차도 가혹하다. 슬프다.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