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종의 기원 / 정유정

다연바람숲 2016. 10. 21. 12:33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아니다. 알아야 했다. 단서들을 조합한 추리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나 자신에게 들어야 했다. 내 안에 나라고 믿는 나 말고 '누군가'가 있는지, 그 '누군가'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모르고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길이 없었다. 아는 순간, 지옥문이 활짝 열린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엎어진다 해도.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길이 망각밖에 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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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다.

이 책을 과연 끝까지 다 읽어야 하나 질문을 반복하면서도 책을 덮지 못했고 읽기를 멈춰야하는 순간이 오면 오히려 불안했으며 다음 페이지가 두려우면서도 다음이 두려워서 또 읽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나.

이것은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내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위해 선에서 악으로 진화하는 인간이 아니라 악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순수 악인 프레데터의 이야기다.

 

작가가 그가 아닌 나로써의 이야기를 완성하기까지 3번이나 다시 써야했던 이유를 나는 알 것 같다. 완벽하게 사이코패스로서의 나를 그려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는 일이 결코 쉽지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알 것 같다.

 

그만큼 잔인하다.

소설을 소설로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잔인하다.

죽음의 대상과 죽임의 방식과 처음부터 끝까지 진동하는 피비린내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나'가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억눌러 온 우리 내면의 본성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죽인 살인마임에도 그또한 아들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는 없어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엄마, 스스로 핏줄의 저주에 걸려들었음을 자각하면서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살아야했던 엄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아들이 사람 속에서 유해하지않게 살기만을 바랐던 엄마, 결국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죽음을 당한 엄마... 그 엄마라는 이름이 너무도 슬퍼서 잔인하다.

 

태양은 만인의 것, 바다는 즐기는 자의 것.

작가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책읽기를 예방주사를 맞는다는 기분으로 즐겨달라 했지만 말처럼 쉽게 즐길 수 없는 예방주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리라. 인간이 인간의 악을 마주보는 일처럼 끔찍하고 충격적인 공포는 없을테니까.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 속의 그가 교묘하게 살아돌아 왔듯이 세상의 사이코패스들이 어딘가에서 섬뜩한 살의의 날을 세우고 있는 한,

 

소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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