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독서 - 빌리는 말

7년의 밤 / 정유정

다연바람숲 2016. 10. 18. 16:25

 

 

 

 

영제는 자신의 세계를 둘러싼 성벽은 높고 단단해 세상의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지금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건 세령의 유해와 잔해뿐이었다. 카드로 쌓아올린 탑처럼, 한 조각이 빠지는 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이었다. 그렇게 만든 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가 정한 위치에, 그가 정한 모습으로.

 

지금에야 깨달은 거지만, 지난 6년이 내 삶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절이었어. 꿈도, 욕망도, 삶의 의미도, 다 잃어버렸지만.... 서원이가 있었거든. 그 아이는 내 삶에 마지막 남은 공이야.

 

ᆞᆞᆞ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신이 깨어나고서야 알았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아들을 살리려고 댐을 열었다고 하겠나? 아들 때문에 완전히 돌아버려서 마을 사람들은 생각도 못 했다고? 나 자신도 오영제를 내가 죽였다고 믿었네. 아내도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겼고. 내가 어리석고 미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침묵하는 것뿐이었어. 지난 7년간, 그날 밤을 수없이 복기했네. '만약 내가'를 끝도 없이 되풀이했고, 하지만 타임머신이 그때로 나를 되돌려준다고 해도, 난 아마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걸세.

 

스스로 부른 운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다.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너는 아비 목에 수없이 밧줄을 건 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풀어야 한다고. 살인범이 아닌 '최현수'라는 불행한 인간의 목에서, 우물에 갇힌 채 죽어간 덩치 큰 남자의 삶에서, 내게 승부구를 요구한 포수의 손에서, 내 아버지의 가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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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다 읽었다고 했을 때 앞서 이 책을 읽은 그녀가 물었다.

 

울지않았어?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면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을지 안다.

 

이해한다. 이해한다.

안다. 안다. 다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도, 나 역시도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는 걸, 알기때문에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낸 마지막 공이, 우리가 지켜내야 할 마지막 공이라는 깊은 공감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이다.

현수... 최현수...

죄는 있지만 그의 삶을 연민하고 동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끝내 왜? 라고 물을 수 없는 이야기.

우리가 웃으며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 나와 세상의 누군가에게도 그가 견디는 우물과 그가 견뎌내는 용팔이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그일 수 있고 그가 나일 수 있는 이야기.

 

끝내 지켜주지못한 세령이와

지켜냈으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서원이에게

어른으로써 미안해지고 아프고 울컥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작가는 말한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그러나'가 있다고.

이야기 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 왜 그래야 하냐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이 소설은 그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가는 또 말한다.

소설을 끝내던 날,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우리들이, 빅터 플랭클의 저 유명한 말처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

 

정유정.

처음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결론은 이래도 되나... 였다.

소설이 흠잡을 곳 없이 이렇게 완벽해도 되나였다.

 

스토리면 스토리, 구성이면 구성, 전개면 전개, 인간의 본질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심리묘사와, 마치 영화처럼 장면과 장면을 이끌어가는 호흡과 흡입력까지 그녀가 괴물같은 소설 아마존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로지 소설 속에만 몰입해서,

책에서 눈을 떼면 책과 현실 세계를 헷갈릴만큼 빠져들어 읽었다.

 

정유정 작가 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