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끌림 - 풍경

봄날은 갔다.

다연바람숲 2016. 5. 29. 19:14

 

 

 

 

 

 

 

 

당신이라는 제국 / 이병률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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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갔다는 것은 또 다른 계절이 왔다는 의미겠지요.

봄날의 꽃들이 피었다지고 그 꽃진 자리 열매들이 자리잡고 잎들은 그제의 하늘을 막막하게 덮어가고 그것이 초록이어서 세상의 꽃들과 하늘과 거리와 지독하게 잘 어우러지는 초록이어서 새롭게 찾아온 계절의 빛깔들이 또 더더욱 선명해지는 것이겠지요.

 

봄날은 간다고...

한동안 라디오 채널마다 흘러나오던 각기 다른 음색의 노래들도 사라져가고,

 

봄이어서 꽃이 핀다냐 꽃이 피면 봄날이지.. 촌스럽게 읊어대던 봄날의 설레임도 사라져가고,

 

있었으나 없었고 없었으나 있었던, 그럼에도 슬픔의 근원이거나 행복의 발원이기도 했던, 기억이거나 사람이거나 그리움이거나 시시때때 문득문득 불현듯이 시간의 발목을 잡던 사소한 감정들도 한낮의 햇살에 시들해지고,

 

그렇게

봄날은 갔다.

 

갔으므로 다시 오지않을 계절에 대하여

다시 와도 이 나이의 그 봄날이 아닐 봄에 대하여

살아갈 날 중 가장 청춘인 오늘 이시간에 대하여

 

꿈만 기억하시라.

꽃만 기억하시라.

화려했던 슬픔만 기억하시라.